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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리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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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 상반기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단 한 편 〈라라 랜드〉였다. 그 후에는 마음이 바빴고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영화를 봐야겠다는 동기가 없었다. 그러던 나를 극장으로 굳이 끌어당긴 작품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리얼〉이었다. 도대체 이 영화가 왜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지, 감독이 뭘 만들었길래 이 난리들인지, 고작 2시간 남짓한 영화 한 편이 어떻게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길래 그리 많은 드립이 난무한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리얼〉의 홍보팀은 나처럼 엉덩이 무거운 사람에게 대단한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일단 그 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성공했다.


2.

영화가 언제 내릴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예매했다. 장맛비를 뚫고 영화관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객석에 나 말고는 여자 두 명이 전부였다. 둘은 웬일인지 외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리얼은 당연히 한국 영화다.


3.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아뿔싸'와 '저런'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계속 튀어나왔다. 일단 총평을 하자면, 이 영화를 수식하는 '괴작', '졸작', '망작' 등의 단어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적확한지 하나를 고르라면 대단히 망설일 영화다.


4.

놀랍게도 영화의 장점이 없지 않다. 많은 컷과 분량을 할애해서 의욕적으로 보여주는 화려한 미장센과 액션신이다. 특히 액션신은 새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게다가 청불을 각오하고 만든 만큼 성인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수위까지 아낌없이 보여준다. 미안하다. 칭찬은 여기까지다. 덧붙이자면, 돈이 엄청 많이 드는 장점뿐이라 안타깝다.


5.

기본적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것은 주인공의 행위에 대한 관객의 이해다. 이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근거로 이 행위를 하고 있는지가 영화의 몰입도를 결정한다. 관객이 등장인물에게 동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면, 주인공이 기뻐하는 장면은 당혹스럽고 슬퍼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럽다. 또한 현실이 아님을 상정하는 영화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만 관객이 불편해하지 않는다. 일부러 비현실적인 배경에서 불친절한 서사를 벌인다면 종국에는 그 갈등이나 괴리를 영리하게 봉합해야 한다. 비현실적인 설정 자체를 나중에 반전으로 둘 수도 있다.

이 당연한 말이 은근히 낯설고, 또 내가 이 당연한 말을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모든 영화에서 이 점은 너무 기본이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는 사항이 아니며, 이 영화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린 영화는 감독의 내면을 서사해서 해석이 분분할 수 있는 컬트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이 영화를 분류하자면 컬트를 찍고 싶지 않았지만 컬트가 된 영화다. 이야기하고 싶은 의도가 있지만 스토리텔링에 있어 어디까지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의 고려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초반부에는 나름대로 등장인물의 '동기'와 '서사'가 보인다. 캐릭터와 배경의 '설정'도 보인다. 다 보고 나니 도저히 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장면이 다수 들어가 있고 설정과 배경이 엉성하긴 해도, 얘가 왜 때문에 얘를 때리고 못 살게 구는지는 알 수 있다. 재미있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몰입할 수 있다. 솔직히 여기까지는 왜 이 영화를 희대의 명작 〈클레멘타인〉에 비견하는지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중후반으로 갈수록 의도적으로 불친절해지는데, 스크린은 감독의 자의식 과잉과 편집 과정에서 뺄 수 없는 액션, 감정씬과 한국 느와르의 잔혹한 장면으로 얼룩진다. 이 장면을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하려면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사건 간 인과관계의 납득이 우선돼야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없어 관객들은 난데없이 번쩍거리는 절박한 장면에 갈팡질팡한다. 종국으로 갈수록 감독은 갈등의 마무리와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나름대로 멋진 장면과 액션신을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불친절한 설정에서 감독이 자아를 십분 발휘하니 이제 관객들은 도저히 얘가 얘랑 왜 자고 얘는 얘를 왜 때리고 얘는 왜 죽었는데 얘가 왜 이런 방식으로 슬퍼하고 얘는 얘랑 어떻게 만났으며 얘는 왜 살아나고 얘는 왜 서로 보고 깔깔대며 웃는지 알 수가 없다. 감독이 그냥 주인공을 괜히 얼음물에 넣었다가 피 뿜게 했다가 소리 지르게 했다가 슬픔에 절규하게 했다가 병원에 입원시키는 종합 비디오를 보는 느낌이다.

마지막에는 한국 영화 스타일로 모든 주인공이 모여서 서로 총을 쏘고 뚝배기를 깨면서 난장을 벌이는데, 이미 관객은 크게 웃을 태세가 되어 있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은 허겁지겁 죽어나가고, 각성한 김수현의 자아는 갑자기 마블이나 디씨 코믹스나 원펀맨급의 비쥬얼적 원맨쇼를 펼친다. 왜 얘네들을 다 때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영락없는 액션 히어로물의 오마쥬다. 그러다 갑자기 아시아 최대의 카지노 시에스타는 개박살나고 수족관에 물이랑 돌고래랑 이런 것들이 와장창 털리면서 물보라가 치는데, 이제 김수현은 엑스트라들을 데리고 현대무용을 하다가 난데없이 철권이나 스트리트 파이터의 커멘드 특수기를 선보인다. 그 모습이 잘 만든 CF나 보이그룹의 뮤직비디오 같다. 종국에는 다 쑥대밭이 되고 세상엔 주인공밖에 안 남는데, 이말년식 서사의 '그래서 지구는 멸망했다.'를 염두에 둔 것 아닌가 싶다. 정말이지 다양한 분야의 오마쥬다.

6.

자아 분열과 그 분열된 자아끼리 벌이는 싸움은 수없이 반복 재생된 화두다. 웬만큼 멋지게 만들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참고할 작품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며, 참고할 철학서는 더더욱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순전히 '있어 보여서' 이 주제의식을 고른 느낌이다. 지금 이 화두의 영화가 받아들여지려면,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자아 분열에 관한 것을 넘어서거나, 아예 다른 철학을 선보여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제의식을 답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7.

등장인물의 대사를 종합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나 세계관 추측을 시도했다. 이는 내가 영화를 볼 때의 오랜 습관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사의 질감이 별로여서 중반 이후 접고 무념무상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대사를 듣고 단순 해석하는 것도 뇌가 필터링에 시달려 버거워했기에, 더 이상의 깊은 사유로 들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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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반면 배우들의 열연이 눈부시다. 김수현이 1인 2역에 노출신에 액션신까지, 촬영장에서 생고생한 것이 눈에 선하다. 또한 설리는 예상을 깨고 배역에 맞는 마스크와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연기력이 검증된 이성민이나 이경영의 연기가 묻힐 판이다. 물론 영화 내에서 이성민이나 이경영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이해하기 어려워 그들의 연기도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여간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는데 관객이 괜히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이런 영화도 쉽지 않다.


9.

이 영화에서는 수많은 카메오가 출연했다고 '들었'다. 앵커로 나온 앵커 김주하 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물론 김주하는 너무 앵커로 나왔기 때문에 카메오보다는 그냥 티비를 틀어놓은 것 같다. 혹자는 나머지 카메오를 '가족이 아니면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또 다른 혹자는 '영화를 카메오에 기대지 않겠다는 감독의 신념'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족이 아니면 찾지 못할 카메오는 왜 나오는가. 저 구석에 그냥 서있거나 머리를 박고 앉아서 미싱을 돌리는 사람이 장안동에 사는 김철수나 수유리에 사는 김영희이면 안 되는가. 아니면 그들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나오는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 내의 카메오라는 존재 의미를 다시금 갑론을박하게 한다. 그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서 왜 존재했다가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는가. 아니면 그냥 장삼이사를 카메오로 세워서 그들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기쁘게 만들면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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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저히 한 마디 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김수현의 분열된 자아가 쓰고 나오는 가면이다. 처음에는 김수현이 복면가왕이나 심형래의 전대물, 혹은 둘 다 출연하려는 줄 알았다. 자아를 찾아간다는 설정으로 감독은 마스크를 조금씩 뜯어내도록 주문하는데, 기본적으로 가면 자체가 너무 반짝거리고 존재감 있어 거슬리는데다가 뿔 안달린 태권브이같기도 하고 현실 세계에서 저런걸 누가 쓸까 알쏭달쏭하다. 가면을 다 벗은 다음에는 인체공학적으로 잘 자른 상처 치유용 메디폼을 얼굴에 조각조각 붙이고 나오는데, 보면서 얼굴이 통째로 어디 아스팔트 같은데 갈린 줄 알았다. 메디폼을 떼자 그냥 멀쩡한 김수현이 나온다. 허탈했다. 그건, 흉이 덜 지게 하려고 얼굴에 붙이는 거라고... 멀쩡한 피부에는 안 붙인다고...


11.

한마디 더. 분열된 김수현의 자아는 직업이 '작가'나 '르포 기자'로 나오는데, 동시에 아시아에서 가장 큰 카지노의 지분을 손쉽게 절반 정도 살 수 있는 엄청난 재력가로 나온다. 그리고 왜 돈이 많은지는 일언반구 없다. 나는 영화 내내 '이거, 제발 설명 좀 해줘.'라고 빌었다. 둘 다 정말 끔찍하게 가난한 직업이라고... 제발... 얘 왜 부자인지 좀 나한테 알려줘...


12.

솔직히 이 영화가 컬트 영화로 분류되었다면 개인적으로 그리 망작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못 만든 작품이라고 했을 것이다. 불친절함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리하고 계산된 불친절함만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시킬 수 있다. 이 영화의 컷이나 미장센과 스토리텔링을 보고 있자면, 흡사 예술성 넘치고 어디서 영화 좀 본 스물한 살의 감독한테 갑자기 백억과 슈퍼스타를 주고 영화를 만들라고 하자, 자기 마음대로 마구 찍고 잘라서 대학 졸업작품을 만든 것 같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전부 마약 중독자로 설정해서, 관객에게 몽롱한 심상을 느끼게 하려고 한 의도는 이해하지만, 감독은 몰라도 관객은 약을 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 심지어 극본과 편집 과정에서 개선의 여지가 충분히 보여서 더 안타깝다. 110억짜리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없었을까. 필경 영화 뒤에 기구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한국 영화가 낳은 기괴한 작품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