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남궁인 Headshot

사과 같지 않은 사과

게시됨: 업데이트됨:
1
연합뉴스
인쇄

티브이에선 대통령이 대국민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나는 보던 소설책을 덮었다. 눈 앞에 허구인 소설보다도 더 엉망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어, 독서가 의미가 없었다.

일단 대통령은 사과하고 있었다. 사과란 '해당 내용이 사실이고, 나는 그에 미안하게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이번 대통령이 사과하는 일은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의혹이 첩첩산중으로 터지고 모두가 의심하고 맞을 것 같다고 억측하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사과는커녕 관련 언급조차 없었고 개헌 같은 헛소리를 했다. 그러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알토란처럼 튀어나오자 끝내 녹화된 방송에서 대통령은 말했다. '사과한다.'


사과한다. 이 단어를 얼마나 말하기 싫었을까.


이 단어를 얼마나 말하기 싫었을까. 추세를 보건대 아마 증거가 안 나왔다면 끝까지 안 하고 싶었을 것이고, 임기가 마치고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도 안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버티고 버텼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되자 끝내 말했다. '사과한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무엇인가 숨겼고, 그것이 말하기 싫은 내용이었고,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는 연설자의 태도와 타이밍이다. 일단 시작부터 참으로 구리다.

그래, 사과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인정한 사과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문서를 국정과 관련 없는 사람한테 넘기고 잘 봐달라고 했고 정치를 대신 해달라고 했다. 담담하게 말하는 사과의 내용이 놀랍게도 국가 대사를 뒤흔드는 불법이다. 기가 막힌다. 기본적으로 국민들은 대통령한테 직접 정치를 하라고 뽑았다. 나라를 당신이 책임지고 이끌어가라고 뽑았다. 근데 내가 안 했고 다른 사람이 조종했다고 했다. 그러면, 적어도 대통령님은 뭐가 불법이고 아닌지 아는 분일 테니, 이게 얼마나 큰 불법인지 알았을 것이라고 가정을 좀 해보자. 숨기려고 했던 것 봐서 알긴 했던 것 같다고 치자.


국민들은, 당신에게 정치를 하라고 표를 던진 대통령이 일반인에게 자문을 받고 조종당했다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대통령이 고른 그 사람은 신분이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일반인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나나 옆집 순이나 뒷집 철수한테 맡길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굳이 꼭 그 사람을 짚어서 다 맡겼다. 근데 여기서 국민들은, 당신에게 정치를 하라고 표를 던진 대통령이 일반인에게 자문을 받고 조종당했다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도대체 왜 이 불법을 반드시 해야 했던 이유는 뭔가? 왜 하필 면천리 이장도 상지면 면장도 아니고 그 사람인가? 그 여자가 당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었나? 어떤 도움을 어떻게 받았나?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같이 벌였나? 또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시킨 국정은 어떻게 변했나? 여기서 기타 다른 문제는 없었나? 일단 당신이 열심히 일했다 치고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면 안되겠는가?

안타깝게도 국민들은 이런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냥 '순수한 마음'이었고, 일부 기간 동안 일부 문서를 수정 받았다고 하고 그냥 어딘가 가버렸다. 지금 대통령이 말한 내용은 국민 앞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인정한 사항이다. 나라의 근간을 자기가 목줄을 잡고 뒤흔드는 내용이다. 하지만 불법 사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벌어졌는지, 국민들은 사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통령에게 전혀 직접 전해 들은 바가 없다. 옆집 순이가 뒷집 철수의 빵을 빼앗아 먹었으면 그렇게 사과해도 된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불법이었고, 자기가 총 책임자인 문서의 유출이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자기가 얼마나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고, 그래서 관련된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이며, 국정의 총 책임자로서 어디까지가 자기 죄이고, 자신을 포함한 그 죄를 어떻게 엄단할 것인지 말해야 한다. 그게 옆집 순이가 아닌 대통령의 사과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일언반구 들을 수가 없다. 사과는 간신히 두리뭉실하게 하고, 그냥 사라진다. 이게 주눅 든 얼굴로 고심해서 나온 사과다. 두뇌의 회로가 여기까지는 안 미치는 느낌이다.

국민들은 어차피 알 것은 다 안다. 국정이 그런 식이었는데, 바보나 멍청이도 아니고 어떻게 조종당했는지 다 보고 들어서 안다. 그러니 숨길 것도 없다. 명확한 사과를, 전후좌우 앞뒤가 완결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과를 해야 한다. 대통령의 일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증거가 나왔으니 할 수 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던진다. 되레 사과를 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 기적과도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 누군가 증거를 안 내밀었으면 저런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니까.


자리에 안 맞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최악의 악덕이다. 대통령 같은 높은 자리일수록 그렇다.


사실 관계야 핵폭탄급이니 내가 더 붙일 말이 없다. 그리고 대통령의 말이야 늘 이런 식이니 이번에도 호들갑 떨 것도 없다. 하여간 기존 대통령들도 다 말은 많았지만, 문제를 일으켜도 그 사람이 했고, 비리를 저질러도 자기중심으로 했다. 이번 사건이 전대미문인 것은, 워낙 무능력해서 아예 자기 혼자 해 먹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사과는 자신이 해 먹기도 어려운 무능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의미가 몹시 컸다. 하지만 모두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와중에도 자기가 무능했고, 그래서 유권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직간접적으로도 안 한다. 차라리 그런 언급을 했으면 조금도 놀라지 않고 약간 이해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원숭이 엉덩이가 발갛다고 누가 종로 대로에서 소리쳐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니까. 되려 그 와중에 아직도 체면과 염치를 기어코 지키는 모습이 놀랍도록 뻔뻔하다.

자리에 안 맞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최악의 악덕이다. 대통령 같은 높은 자리일수록 그렇다. 하지만 대통령이 꼭 세대를 초월하도록 똑똑하거나, 모든 이들 위에 올라설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훌륭한 사람들이 몰래 나라를 잘 돌린다. 허나 최소한 대통령은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하고 자기 말을 하고 자기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어울린다. 이렇게 치면 우리나라에 허드렛일부터, 자기 주관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새털처럼 많다. 이 사람 중에 하나면 누구든 대통령도 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하지만, 그게 참으로 어렵다. 이 나라가, 소설 같이도 그렇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