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배명복 Headshot

뉴스메이커 된 대통령 특보

게시됨: 업데이트됨:
1
뉴스1
인쇄

경위가 어떻든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이 뉴스메이커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보기에 안 좋은 건 둘째치고 정책에 혼선을 불러올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뉴스의 한복판에 섰다. 지난주 워싱턴 우드로윌슨센터 세미나에서 한 발언 때문이다.

그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미 연합훈련과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축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북대화의 조건을 북·미 대화의 조건과 맞출 필요는 없다는 말도 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때문에 한·미 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며 돌직구도 날렸다. 하나같이 인화성 높은 발언들이다.

세미나에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사견을 전제로 대답했을 뿐이라지만 논란은 불가피하다. 문 교수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문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말은 곧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조용히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특보의 역할이다. 공식적인 발언은 가급적 자제하거나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게 옳다. 말이 길어지면 설화(舌禍)가 따르기 마련이다.

부랴부랴 청와대가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으며 진화에 나섰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청와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워싱턴 쪽에서는 벌써 우려 섞인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을 불안하게 보는 국내 보수진영과 야당들은 호재를 만난 분위기다. 온갖 비난이 청와대와 문 교수에게 쏟아지고 있다. '외교 참사' '아마추어 외교' '촉새 외교'를 질타하며 당장 특보직을 내려놓으라고 난리다.

문 교수의 발언은 학자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다. 새로운 내용도 아니다. 그동안 수없이 했던 얘기들이다. 중앙일보 칼럼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쪽 전문가 그룹에도 문 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나도 비슷한 의견이다. 대통령 특보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외교 현안에 대한 시각과 해법은 동맹국이라도 서로 다를 수 있다. 북핵 문제나 사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국과 미국의 생각이 처음부터 똑같다면 그게 되레 이상한 일이다. 이견이 있으면 서로 협의해 공통분모를 찾을 일이지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고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아무리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옹색한 처지라지만 워싱턴의 심기를 건드릴까 겁이 나 찍소리도 못한다면 그게 어디 주권국가인가. 미국부터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않을까.

문 교수의 발언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북핵 문제를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를 통해 해결한다는 대원칙에는 한·미 간에 이견이 없다. 다만 미국은 압박에 무게를 두고 있는 데 비해 문재인 정부는 압박과 함께 관여, 즉 대화에도 무게를 싣겠다는 것이다. 일종의 역할 분담론이다. 남북대화를 북·미 대화와 연계시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한반도 문제의 주인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행동의 일치가 아니라 역할의 분담이 참다운 한·미 공조다.

압박과 제재 위주로 나아가서는 북핵 문제에서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의 교훈이다. 현상 타개를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한 '햇볕정책'으로 되돌아가자는 얘기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한·미 연합훈련과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축소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우려를 일정 부분 해소해 주면서 가장 시급한 북한 핵과 미사일 활동의 동결부터 이뤄 내고, 최종 목표인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사드 문제도 법에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한다.

1시간20분 동안 진행된 기자회견 전문을 읽어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문 교수의 발언 수위가 올라가고 직설적으로 변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워싱턴에 나와 있는 한국 기자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듭된 질문이 '사자의 코털을 감히 어떻게 건드리느냐'는 투의 대미(對美) 의존적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자 문 교수도 신중함을 잃고 막 나간 측면이 있다는 게 기자회견을 지켜본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기자회견을 통해 한·미 간 현안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생각을 드러내는 효과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득보다는 실이 커 보인다. 한·미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민감한 시점을 고려하면 그 뛰어난 논리와 영어 실력으로 백악관의 한반도 정책 담당자들과 은밀히 일합을 겨루는 편이 훨씬 나았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kak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