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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엔 지금이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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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 New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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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작지만 강한 것은 토론문화 때문이란 얘기를 오래전에 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토론은 사막의 모래처럼 뜨겁기로 유명하다. 계급장 떼고 논리와 논리로 대결을 벌인다. 때론 고성이 오가고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이스라엘 각의는 늘 시끄럽다. 총리와 각료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거침없이 주장과 반론을 주고받는다. 의회도 마찬가지다. 토론은 살벌하지만 합의가 이루어지면 모든 참석자가 깨끗이 승복한다. 뒤돌아 딴소리하는 법이 없다. 합의 결과는 일사불란하게 실행에 옮긴다. 척박한 조건에서도 생존을 유지하는 그들만의 비법이다.

 생각과 노선이 서로 다른데도 군말 없이 합의에 따르는 것은 그만큼 토론 과정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열띤 토론 끝에 나온 결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너나 그의 결정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결정이 된다. 어디로 갈지 피 터지게 싸우다가도 방향이 정해지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게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박근혜 정부에 몸담았던 엘리트 관료들 중에는 정부의 대외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특히 대북정책이나 대일정책은 실패했다고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국제사회와 손잡고 온갖 제재 수단을 동원했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위안부 합의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정부 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올 만하지만 외교안보 부처 고위 공직자가 대외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공직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물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개인적으론 동의하지 않지만 토론을 통해 정책으로 결정된 이상 군말 없이 따르는 게 맞다고 보기 때문이란 변명은 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토론에 대한 모독이다.

 압박 일변도 대북정책이 토론다운 토론 끝에 나온 정책이 아니라는 건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안다. 그런데도 정부 내에서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는 것은 아무도 그걸 자신의 의견이 반영된 나의 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부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된 너의 정책이고, 그의 정책이기 때문에 잘못돼도 나와 상관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렁에 빠진 대북정책에 대한 한국 외교 엘리트들의 기이한 침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외교부 고위 공직자들 중에는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도 많이 있다. 그들은 실력으로 그 자리까지 갔다. 특정 정권의 덕을 본 게 아니다. 그들이 충성을 바칠 대상은 국가와 국민이지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이 아니다. 위에서 결정했으니 별수 없이 따른다는 식으로 문제를 뻔히 보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직업적 명예와 자존심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것이다.

 강요된 일사불란은 실제 위기가 닥치면 금세 무너지게 돼 있다. 엘리트 관료의 헌신은 합의된 정책을 자신의 정책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토론다운 토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지금 같은 풍토에서 진정한 충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 외교의 난맥상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당연히 토론 없는 의사결정 구조를 만든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국무회의에서,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외교안보 부처 장관회의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토론다운 토론, 제대로 된 진짜 토론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윗사람은 토론을 빙자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아랫사람은 열심히 받아 적었을 뿐이다. 엘리트 관료들이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고 토론에 적극 참여하고, 이를 통해 너와 그의 정책이 아닌 나와 우리의 정책이 만들어질 때 대외정책은 물론이고 다른 정책들도 제자리를 찾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한 달 후 도널드 트럼프가 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외교 환경의 일대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선택은 더욱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 핵에 대한 트럼프의 대응은 완전히 예측 불허다. '하나의 중국' 정책마저 협상카드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가 주한미군을 협상카드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러시아까지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 국제정치·경제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한국 외교가 풀어야 할 방정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뗀 지금이 한국 외교에는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박 대통령의 간섭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데다 순방외교의 과중한 부담에서 벗어나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 한국 외교의 활로를 탐색하는 귀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격의 없는 토론을 통해 한국의 외교 엘리트들이 가진 모든 지혜를 끌어모을 수 있다면 말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