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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남긴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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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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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첫 일요일이었던 지난 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모든 게 그대로다. 광화문도, 세종대왕 동상도, 교보문고 빌딩도, 세월호 유가족이 설치한 천막도 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광장 주위로 차량들이 오가고, 나들이 나온 시민들은 아이들 손을 잡고 여유롭게 광장을 거닐고 있다. 열심히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과연 이곳이 전날 170만 명(주최 측 추산)의 인파가 모였던 그 광장 맞나. 혹시 내가 꿈을 꾼 건 아니었나.

 분명 그건 꿈이 아니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인파를 난 본 일이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때 서울광장에도 있어 보고, 1987년 시민항쟁 때 넥타이 부대에 섞여 구호도 외쳐 보고, 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홈팀이 우승한 날 파리 샹젤리제에도 있어 보고, '아랍의 봄' 당시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도 있어 봤지만 어떤 경우도 이 정도 인파는 아니었다. 조계사 앞을 지나온 촛불 군중과 안국동 쪽에서 온 촛불 군중이 인사동 입구에서 만나 거대한 불줄기를 이루며 청와대 쪽으로 향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사람들은 촛불을 흔들며 초대가수의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거기엔 남녀도 노소도, 진보도 보수도 없었다. 유모차에 실려 나온 어린아이들에게 사람들은 미소를 보내며 길을 터줬다. 청소년들은 비닐봉지를 들고 열심히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하고 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6주째 주말마다 계속된 촛불시위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해외 언론은 그 많은 인파가 모였음에도 사고 한 건 없이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데 관심을 넘어 신기함을 보이고 있다. 주변 상점들은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고, 유리창 한 장 깨진 게 없고, 쓰레기 하나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최루탄과 물대포가 등장하고, 약탈과 방화가 난무하는 여느 시위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평화적인 시위가 가장 강력한 시위라는 것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 단위로, 연인끼리 손을 잡고 나왔다. 그들의 집단지성은 폭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각자 손에 든 스마트폰은 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장치였다. 사람들은 분노를 웃음과 해학이 있는 축제로 승화시키는 성숙함과 자제력을 발휘했다. 자유로움과 발랄함 속에서도 안 보이는 질서를 만들어냈다.

 촛불시위로 박근혜 대통령은 그토록 염원하던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냈다. 한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업적도 남겼다. 위기에 처한 세계 민주주의에 한국형 촛불시위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영화·드라마·뮤지컬·소설 등 각종 장르에 걸쳐 자신이 주연 또는 조연으로 등장할 수많은 문화 콘텐트가 쏟아질 수 있게 해준 것도 업적이다. 잘하면 한류의 새로운 '대박 상품'으로 자리 잡으며 두고두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지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업적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새삼 깨닫게 해준 점이다. 시민들의 평화로운 의사 표시가 갖는 힘과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아이들에게 일깨워주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 점도 업적이다. 그래서 세상일에는 양면이 있고, 위기는 기회와 통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즉각 퇴진'과 '박근혜 구속'을 외쳤다. 신뢰와 자격을 잃은 대통령이 대통령 행세를 하는 것을 하루도 못 참겠으니 당장 내려와 사법 절차에 따라 죄에 합당한 벌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들이 우선 바라는 것은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사법적 정의의 실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촛불이 꺼진 다음 어떤 세상을 만드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은 특권이 통하지 않는 세상, 열심히 노력하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잘살 수 있는 세상, 부모 잘못 만나도 노력하면 언젠가 작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 빈부격차가 터무니없이 크지 않은 세상,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세상,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는 세상, 검찰을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아닐까.

 싫든 좋든 그건 결국 정치의 몫이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을 실현할 나름의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곧 무대에 올라 경쟁을 벌이게 된다. 각자 자기 구상과 전략을 펼쳐 보이고 공정하게 경쟁해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한다. 말만 잘한다고, 스펙이 화려하다고 다가 아니다. 공약은 물론이고 인격과 능력까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촛불을 들고 추운 겨울 광장에 나가는 건 이번으로 족하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