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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요상한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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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DOGAN
ASSOCIATE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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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逆境)을 순경(順境)으로 바꾸는 것이 리더십의 최고 경지라면 전 세계 지도자들이 무릎 꿇고, 한 수 가르침을 청해야 할 통치의 '지존(至尊)'이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되시겠다.

그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군부의 쿠데타를 단 6시간 만에 잠재우고 전장(戰場)에서 개선한 영웅의 코스프레로 지지자들 앞에 우뚝 섰다. 단숨에 위기를 기회로 바꾼 그에게는 더 이상 거치적거릴 게 없어 보인다. '21세기의 술탄'으로 가는 탄탄대로만 남았다.

귀환 일성으로 그는 쿠데타 연루자들에 대한 가혹한 단죄를 공언했다. 그는 "국가기관에 암세포처럼 퍼져 있는 바이러스를 박멸할 기회를 선물로 준 신에게 감사한다"며 대대적인 피바람을 예고했다. 이틀 새 검거된 사람만 약 6000명에 달한다. 명분은 그의 편이다. 민주적 헌정 질서를 파괴한 반역자들을 엄벌한다는 데 누가 감히 반대할까.

쿠데타는 터키의 '전통'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쿠데타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쿠데타는 주모자들의 개인적 동기 못지않게 구조적 요인도 중요하다.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이 맞아야 도모할 수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정세 예측 전문가인 제이 울페들러가 만든 수리 모델에 따르면 올해 터키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확률은 2.5%에 불과하다. 그 정도로 이번 쿠데타는 뜬금없다.

1960년 이후 터키에서는 네 번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허술한 경우는 없었다. 과거의 경우 육·해·공군 전체가 조직적으로 참여했고, 사전에 민간 정치 엘리트들과의 교감이 있었다. 거사와 동시에 민간으로 지지 분위기가 확산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쿠데타에 참여한 군(軍)은 일부에 불과했고, 민간의 지지 선언도 없었다. 방송국도 일부만 장악했고,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당연히 의문이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대에 결행한 과거의 쿠데타들과 달리 이번엔 사람들이 주말 저녁을 즐기던 금요일 오후 10시 무렵에 일어났다. 에르도안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지지자들에게 봉기를 촉구한 것이 대세를 뒤집는 결정적 전기가 됐다고 하지만 그 시각 이미 터키 전역의 모스크에서는 무슬림들의 저항을 독려하는 스피커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고,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 지지자들에게는 같은 내용의 문자메시지가 발송됐다. 쿠데타 시도가 있을 걸 미리 알고 대비했던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쿠데타가 완전히 진압되기도 전에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적(政敵)인 펫훌라흐 귈렌을 배후로 지목하고, 미국에 송환을 요구했다. 또 전체 판검사의 36%에 해당하는 2745명을 쿠데타 동조 혐의로 해임하고, 이들에 대한 검거를 명령했다. 미리 작성해 둔 리스트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때맞춰 사형제 부활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기회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잠재적 적대 세력을 몽땅 뿌리 뽑아버릴 기세다.

에르도안은 AKP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구금하고, 반(反)정부적 언론사들을 폐쇄하는 등 반대 세력에 대한 조직적 탄압으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죄어 왔다. 그럼에도 과거에 쌓은 경제적 업적과 서민층이 좋아하는 이슬람주의 성향에 힘입어 그의 지지율은 늘 40~50%에 달한다. 2003년 집권 이후 선거 때마다 AKP가 연승을 기록한 정치적 기반이다.

그가 모든 문제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귈렌은 이슬람 성직자 출신의 사상가 겸 평화운동가다. 세계 100대 지성 중 1위로 꼽힌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종교 간 화해와 문명 간 대화를 역설하며 과학기술과 교육을 신봉하는 현대적 이슬람 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한국에서 '만해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를 따르는 터키인들은 '히즈멧(봉사) 운동'을 통해 터키 국내외에서 각종 사회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귈렌은 에르도안을 도와 이슬람 민주주의의 모범국가 건설을 꿈꿨지만 에르도안이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에르도안은 실패로 끝난 이번 쿠데타를 터키 내 히즈멧 운동 잔존 세력을 소탕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있다. 쿠데타를 역이용해 보란 듯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남은 정적까지 모조리 제거하고 나면 그는 그동안 추진해 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 아래의 술탄 같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에르도안이 이끄는 터키는 애써 빚은 도자기를 스스로 깨버리듯 힘겹게 이룩한 이슬람 민주주의를 스스로 박살 내고 있는 이상한 나라다. 약 1700명의 사상자를 낸 채 어이없이 끝난 이번 쿠데타는 에르도안에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해체하는 길을 열어줬다. 이상한 나라의 참으로 요상한(?) 쿠데타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