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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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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DUM FLAG
Toby Melville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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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 여부를 결정 짓는 국민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만일 잔류로 결론이 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가 무산된다면 영국의 전도유망한 여성 정치인 조 콕스의 죽음은 유럽 통합의 제단에 바쳐진 '순교'로 기억될 것이다.

'반(反)브렉시트' 캠페인을 열성적으로 벌여온 초선의 노동당 국회의원인 콕스는 지난주 괴한이 쏜 흉탄에 맞아 41세의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여론이 다시 뒤집혀 잔류파가 탈퇴파를 앞선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뚜껑을 열기 전에는 섣불리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박빙이다.

영국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절벽 아래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뛰어내릴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뇌하는 햄릿이다. 모든 상식은 브렉시트는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탈퇴 편에 선 사람들은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EU 관료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주적 자결권'을 회복하는 것이 영국이 살 길이라며 "통제권을 환수하라(Take back control)"를 만트라처럼 외치고 있다.

EU와 결별하고 '영예로운 고립'을 택하는 게 낫다고 보는 이들의 심리에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 영국은 EU 회원국이지만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는 물론이고, 국경 통제를 철폐한 솅겐 협정에서도 빠져 있다.

안보·경제·조세·복지·교육·의료 등 다양한 정책 분야에서 폭넓은 자율권도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유독 영국에서 '유럽 회의론'이 기승을 부리는 배경에는 섬나라인 영국은 유럽대륙과 다르며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앵글로색슨 예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글로벌 시대가 됐다. 상호연계성과 상호의존성이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주권의 의미는 퇴색하고 있다. 개방과 경쟁은 이 시대의 코드다.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하는 것이 나을 때는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는 '공유주권' 개념이 대세이고, EU는 이를 근거로 창설되고 발전해 왔다. 이런 시대에 주권의 낡은 상징에 연연하는 것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시대착오다.

영국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EU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EU 밖에 있는 영국의 지위는 전과 같을 수 없다. 당장 미국의 최고 동맹국 지위를 잃게 될 것이고, 영국의 고독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나라는 별로 없을 것이다.

브렉시트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이어져 영국의 분열을 부채질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브렉시트는 '대영국(Great Britain)'을 '작은 잉글랜드(Little England)'로 축소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게 뻔하다.

영국의 자살은 영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브렉시트의 '베르테르 효과'는 EU 내 다른 회원국들의 탈퇴 움직임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높은 실업률과 난민 사태에 테러까지 겹치면서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극우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브렉시트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해온 개방적 국제주의가 퇴조하고 폐쇄적 고립주의가 부활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프랑스의 극우파 정당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나 무슬림과 멕시코인에 대한 국경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브렉시트 주장이 먹히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실망 외에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며 브렉시트의 위험성을 경고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밥그릇만 생각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과장된 위협과 협박으로 치부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라이제이션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서민 계층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EU 잔류를 외치는 기성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반발심이 오히려 잔류 반대 표심을 자극하고 있는 셈이다.

EU 28개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EU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23%에 불과했다. 43%가 부정적이다. 재정위기와 난민 사태 등에서 EU가 보여준 대처 능력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리스 사태를 통해 단일통화의 근원적 결함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영국의 국민투표는 EU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콕스 의원의 희생을 순교로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