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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민 끝에 5번이 아닌 1번을 찍게 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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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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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노무현대통령 취임 이후 거의 1년 동안은 나는 여지없는 '노빠'였다. 그 무렵 한겨레, 경향을 비롯해 꽤 여러 곳에 기고하던 칼럼에서 나는 노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재야대변인처럼 행세했다. 나는 이를 테면 '나는 대통령의 막말이 즐겁다' 같은 제목의 칼럼도 썼다. 그와 그의 정부는 마치 권력을 접수한 혁명군처럼 보였고, 그들의 언행은 하나하나가 신선했으며 진부하고 경직되었던 낡은 한국식 권부의 모든 것을 조롱하고 전복하는 쾌거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편은 보수언론과 기득권체제의 집요한 저항에 의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한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해, 노무현정권은 결국 어떠한 '혁명적 차이'도 산출하지 못하는 얼치기 진보정권으로 주저앉기 시작했고,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공할 위력에 대해 비로소 깨닫게 된 2004년 무렵부터 나는 서서히 그들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 갔다. 그 다음부터 노무현정권의 이전 정권과의 차이란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유별난 정념과 거친 듯 낯선 듯한 수사학들뿐이었다. 더 시간이 지나자 그 역시 그저 뒤늦게 '운동'에 뛰어든 'B급 운동권'의 흔한 특징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정권교체 전선에 문제가 생길까봐,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문재인과 민주당에 표를 준 것이었을까?


오늘에야 고백하지만 지난 5월 5일, 사전투표장에서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소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1번과 5번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결국 1번을 찍었다. 말하자면 전략투표와 소신투표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다가 전략투표로 낙착을 본 것으로, 정강정책을 생각하면 정의당의 심상정에 표를 줘야 하지만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정강정책이나 행태 면에서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문재인에 표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흔한 얘기였다. 하지만 정말 이유는 그뿐이었을까. 그 순간 내 손을 결국 1번 쪽으로 잡아끈 것이? 나는 정말 심상정과 정의당에게 표를 주고 싶었는데 혹시라도 정권교체 전선에 문제가 생길까봐,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문재인과 민주당에 표를 준 것이었을까?

더 래디컬한 쪽에서 본다면 가소롭다 하겠지만, 지난 40년 동안 나는 래디컬리스트를 자임했고 더구나 문학한다는 명분까지 더해서 가장 불온한 유토피아에 대한 몽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현실의 정치행동에서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 왔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그런 선택이 전부인 것 마냥 행동하는 사람들을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수 접고 대해 왔었다. 말하자면 나는 늘 이번 대선에서처럼 "무조건 정권교체, 무조건 문재인"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속으로 "이 중생들아, 나는 심상정도 한참 부족해, 차마 더 이상 꼴보수세력의 집권을 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문재인을 찍게 되겠지만" 해왔던 것이다.


나는 정말 문재인보다 심상정, 혹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는 정말 문재인보다 심상정, 혹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나의 정치적 입장은 정말로 급진적인 것이어서 현재의 문재인 정권을 온건 부르주아 자유주의정권으로 규정하고, 이 정권에 대해서는 제한적, 한시적 지지만 보내고 어서 벗어나 사회민주주의나 혹은 그 이상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혹은 나아갈 수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일까. 혹시 이런 생각은 몽상과 현실의 간극을 주관적으로 무화시키고 싶은, 냉정과 객관을 가장한 오랜 조급주의의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결국 의미 있는 것은 하루하루의 행동과 실천이며 그 실천을 밀고나가는 정념의 힘뿐이라고 할 때, 이런 조급주의는 오히려 성실한 일상적 실천을 유보하고 경시하는 근원적인 불성실성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태도야말로 언제나 남들이 애써서 이루어놓은 최량의 성과만을 똑똑 따먹는 가장 교활한 기회주의는 아닐까.

노무현정권은 실패한 정권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한미 FTA를 끝까지 반대하고, 이라크 파병을 결사 저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몽상, 혹은 이상의 급진적 현실화는 분명 역사를 지금과는 다른 길로 이끌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다른 길이 올바른 길일까에 대한 확신은 이제는 없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공할 폐해를 제대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 겨우 2004년 전후였다고 할 때, 당시 한미 FTA나 이라크파병 반대 등을 관류했던 민족주의적 사고는 과연 얼마나 현실정합적이었던가.


솔직히 말하면 문재인에게, 노무현의 친구인 그에게 한번 다시 해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근에 어느 주간지에 기고한 다른 글에서 나는 선한 정념과 정의의 수사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썼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말이었지만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하면 선한 정념과 그것이 기초한 정의의 수사학이 없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노무현 정권 시기를 돌아보면 실패의 기억보다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벌어졌던 그 사람(들)의 뜨거운 고투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는다. 나이가 들수록 과학적 전망이나 역사적 당위 같은 사람 바깥에서 안으로 이입되는 차가운 언어보다 분노, 슬픔, 공감, 회한 같은, 사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번지는 뜨거운 정념의 언어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도 그것이 그날 내가 고민 끝에 5번이 아닌 1번을 찍게 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문재인에게, 노무현의 친구인 그에게 한번 다시 해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문재인이라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해 보이는 사람의 속에 사실은 비수처럼 시퍼렇게 박혀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 깊고 뜨거운 정념과, 그 정념을 이기지 못해 어눌하고 더듬더듬한 발성으로밖에 나오지 못하는 그 낡고 변변치 못한 수사학이 지닌 가능성에 한 표를 기꺼이 던졌던 것이다. 설사 그 기대가 다시 실패로 바뀐다 해도 어쩔 것인가. 그 정념의 불이 꺼졌기 때문이 아니라면 그 실패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한낱 강령이나 노선, 정세분석 같은 것으로는 결코 다 포착할 수 없는 역사의 간지 탓이 아니겠는가. 간절한 몽상만 잠들지 않는다면, 그때 또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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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제19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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