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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단 그리고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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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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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신간시집을 내고 나서 안면이 있던 신문기자에게 전화로 자기 시집 기사를 안 내주냐고 진반농반 얘기를 건넸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그 신문사의 문학담당 기자는 그 시집에 대한 기사를 쓰는 대신 그 시인의 시들에 깔려있는 젠더적 (무)의식을 이렇게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죄라고는 사랑한 죄밖에 없는, 가난하고 불쌍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낭만적인 나'의 서사 밑엔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 그는 세계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세계의 메커니즘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기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문학, 혹은 한국문단에 만연한 성차별에 대해 예를 들며 "세계 바깥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왜 세계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는지"를 묻고 "세계의 견고함을 찢는 문학의 불온함은 안온한 착취 메커니즘 위에선 결코 가동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답을 내린다. 성차별의 언행이 횡행하고 그것이 문학의 이름으로 면죄받는 문학과 문단에 대한 매우 매몰찬 단죄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수현,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한국문단과 여혐, 한국일보, 2016.9.16.)

많은 사람들이 이 칼럼을 읽고 그 문제의 시인이 누구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는 동안, 그 당사자가 스스로 그건 바로 나라고 '커밍아웃'을 하고 나섰다. 그는 류근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신이 마치 노골적 기사 청탁이라도 한 것처럼 글을 쓴 그 기자를 비판하면서 "독자든 기자든 시에 대한 오독과 모독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사실 관계에 대한 정확한 확인도 없이 한 개인을 이렇게 뭉개버리면 그 언론은 권력도 아닌 양아치 폭력으로 좌초되시는 거 아닌가. 더구나 구체적 근거(작품 인용 등)도 없이 개인적 지레짐작만으로 여혐에 대한 총알받이로 시인의 시집을 이용하다니..."라고 개탄하는 글을 올렸다.

사실관계를 말하자면 류근 시인은 자신의 말대로 노골적 기사 청탁을 한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그냥 그 신문사의 아는 기자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꼭 실어달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류근 시인을 모르지만 그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종종 접하면서 그가 그런 식의 압력을 행사하는 종류의 시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황수현 기자 역시 그것을 직접 청탁을 받았다고 쓰지도 않았고 또 그 스스로 심각한 압력으로 생각한 흔적도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라면 그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라는 제목이 문제인데 칼럼 등 기사 외의 신문사 내외의 기고물에 제목을 정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편집부의 소관이다.

칼럼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황기자가 원래 정한 제목은 부제로 처리된 "한국문단과 여혐"일 것이고, 선정적 제목을 뽑는 데 익숙한 편집부 기자들이 본 제목을 그렇게 달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류근 시인으로서 자신이 노골적 기사청탁이나 하는 인간으로 취급받았다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황기자도 그 점에서 본다면 피해자에 가깝다.

나는 황수현 기자의 칼럼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성을 전제로 하는 기사도 아니고 칼럼인 바에, 그것도 본인이 작성했다고 보기 힘든 선정적인 제목 외엔 특별히 예에 어긋난 점도 없다. 황기자는 그 시인의 실명을 밝힌 것도 아니고, 일반 독자라면 그 시인이 누구인가를 추단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나름 신중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언뜻 세계와 불화하는 듯도 하다. 가진 자와 성공한 자들에 비해 처량하고 궁상맞은 자신의 신세를 노래한다."라든가, "죄라고는 사랑한 죄 밖에 없는, 가난하고 불쌍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낭만적인 나"라든가 하는 부분은 기자가 류시인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생각이 있었다면 쓰지 않았을 부분이다.

문제는 이 글에 대한 류근 시인의 태도에 있다. 진지하고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대할 때 다짜고짜 발끈하기 전에 그 비판의 합리적 핵심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한 점이 있었는지 살피는 게 우선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다. 설사 진반농반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친분이 있는 상대라 할지라도 시인이 기자에게 자기 시집에 대한 소개 기사의 게재 여부를 입에 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설사 친분이 있는 기자에게 그런 말을 할 당시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누군가가 시인의 기사청탁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분노'보다는 '부끄러움'이 먼저 앞서야 하는 것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통속의 위악'을 하나의 문학적 방법론으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던 류근 시인이 어느 결엔가 그 위악의 무기를 버린 채 '통속' 그 자체에 길들여져 버린 것은 아닌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아마도 류근 시인에게는 가장 억울한 부분일 테지만, 자신이 기자의 "개인적 지레짐작만으로 여혐에 대한 총알받이"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 나도 류근 시인의 시들을 면밀히 다시 읽지는 않은 상태에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에 황 기자가 말한 대로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는 혐의를 받을 만한 부분은 적지 않다. 그것은 그가 노골적으로 여성을 '혐오'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늘 여성에 대한, 혹은 여성으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고 여성에게 매우 친근한 경사를 지니고 있는 시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수현 기자는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시에 "여성이 방석처럼 깔려있다"고 본 것이다.

'여성혐오'의 원어인 misoginy는 여성을 싫어한다거나 증오한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남성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모든 전략"(노혜경)이라고 보는 것이 더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 그럴 경우 문자 그대로의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여성 보호, 여성 존중, 여성 애착 등 겉보기에는 매우 여성친화적으로 보이는 태도들 역시 차별적인 젠더역할을 고정화시켜 남성지배의 구조를 영속화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미소지니'이고, 황수현 기자는 이런 맥락에서 류근 시인의 시들 역시 '여성혐오'의 반열에 위치지은 것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에서는 또한 매우 상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따로 언급하겠지만, 나는 문인도 먼저 시민이어야 한다는 취지의 비평가 오길영 선생의 말에는 약간의 이견을 가지고 있다. 문인도 시민일 뿐이라면 역설적으로 언필칭 시민사회에 가득한 미소지니를 비롯한 온갖 불의와 행악에서 문인만 유독 빠져나와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문인은 늘 바깥을, 너머를 꿈꾸고 말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격렬한 자기 성찰과 자기 극복이 요구된다.

물론 시민 이하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문단'이라는 곳에서는 종종 '시민 이하'의 일들이 많이 벌어져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관대하게 보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곳을 문단이라고 보호해 줄 어떤 언턱거리도 없다. 문학이 별 게 아닌데 문단이 별천지일 수가 없다. 황수연 기자의 칼럼은 한편으로는 문학기자로서는 드물게 과감한 비판이지만, 그것은 그 혼자의 용기를 떠나 이젠 문단이나 문인 따위는 그런 대우를 받아도 상관없다는, 혹은 그렇게 대한들 어쩔 것이냐 하는 다수의 차가운 시선이 가로놓여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문학의 이름으로' 밥을 먹고 사는 처지에 씁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