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명인 Headshot

진보를 '참칭'하는 자들

게시됨: 업데이트됨:
1
Gettyimage/이매진스
인쇄

'진보주의' 혹은 '진보주의자'를 통칭하는 '진보'라는 말이 요즘처럼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을까 싶다. '넥슨성우-웹툰작가들-정의당 무슨 위원회'로 이어지는 티셔츠 파동에서 시작해서 최근의 <시사인> 절독사태에 이르는 '메갈리아'와 관련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이른바 일군의 '진보'남성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거지를 보면 '진보'라는 말이 이젠 시장바닥의 땡처리 허드레 옷값보다도 더 값어치가 떨어진 느낌이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는 진보주의의 오랜 근거가 하나의 허구이거나 신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것이 오늘의 세계를 더 살기 힘든 것으로 만든 원인 중의 하나라는 인식이 어느 때보다 더 팽배해져 있는 터라 이참에 '진보'라는 딱지를 차라리 폐기처분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현재의 세계를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인정하고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저앉기로 하지 않는 이상,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핵심 자질로 하는 진보적 사유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대로 두지 않고 보다 나은 쪽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잠정적으로 '진보주의'라 칭하는 것 외에 별 다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오늘날 진보주의의 '착한 핵심'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나는 세상을 이렇게 '현상태'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진보주의의 부정정신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아니 본래부터 타자는 없으므로 '타자화된 존재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고 해 두자.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는 모든 '진보 이념'의 출발점에는 이 타자화된 존재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가로놓여 있다. (19세기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사회(공산)주의가 출발했고, 여성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페미니즘의 출발했으며, 피식민지 인민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탈식민주의가 출발했을 것이다.)

'타자화되는 존재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어떤 도그마에 대한 맹신이나 합리적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이 현실에서 어떤 존재들이 어떻게 타자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그들이 그 타자화로 인해 겪는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전이시키는 정서적 능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현존하는 종교, 형이상학, 정치철학 등의 이데올로기들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현실적이며 생동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을 느끼는 주체의 자기 성찰과 자기 갱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거짓됨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타자화되어 고통받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 혹은 공감하려는 노력이 없는 자들이 '진보'의 이름을 참칭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그것은 '진보'가 애초의 기원에서 벗어나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심지어는 타자를 윽박지르는 '억견'으로 화석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욕한다고 진보가 아니다. 미국을 욕하고 친일파를 비난하는 게 진보가 아니다. 평화통일주의자가 진보가 아니다. 권력층과 부유층을 저주하는 게 진보가 아니다. 그것이 그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로 인해 타자화됨으로써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간절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자기성찰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그런 태도들은 '진보적'인 태도가 될 수 있다.

특히, 나는 민족주의자이거나 국가주의자들이 '진보'를 참칭하는 것은 정말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아마도 자기들이 '진보'라고 하면서 이 세계의 대표적인 타자화된 존재들인 여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혐오(재타자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 바로 '진보'를 참칭하는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들(잠재적 파시스트들)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