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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일자리 공약, 숫자 놀음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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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청년문제는 곧 실업의 문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난 시기 10여 차례 발표된 정부의 청년실업 대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결과론적으로는 사실이다. 청년실업 대책이 수차례 반복되는 동안에도 청년실업 문제는 꾸준히 악화돼, 지금의 관점으로 10년 전을 돌아보면 '다들 취업이 잘됐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정당과 정치인, 기업들이 발표한 일자리 창출 공약의 숫자를 다 더하면 대한민국 인구수보다 많다. 그래서 나는 "청년 일자리를 n만 개 창출하겠습니다"라는 구호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청년문제에 '노동'이라는 관점이 강화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는 청년 워킹푸어(Working Poor)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고 실천적인 대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워킹푸어는 일하는 빈곤층을 뜻하는 말로 열심히 일을 해도 저축을 하기 빠듯할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계층을 의미한다. 워킹푸어는 월급이 나오는 일자리가 있어 얼핏 보기엔 중산층처럼 보이더라도, 고용의 유지가 불안하고 저축이 없어 갑작스런 병이나 실직 등으로 한순간에 절대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다.

그동안 2030세대는 근로빈곤의 위험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져 왔으나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청년실업이 구조화·장기화하면서 취업을 원하는 청년들의 처지가 곤궁해졌다. 많은 기업들이 이러한 상황에 편승하거나 악용하여 노동시장에 신규로 진입한 사회초년생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그리고 청년들에게는 조직에 내재된 비합리적인 노동조건이나 업무환경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정신적으로 나약하다', '신입직원(청년)들이 업무지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평판이 형성된다.

이와 같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어렵게 취업한 일터마저 떠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신입사원 이직 현황' 통계에 따르면 취업경험이 있는 청년층 400만명 가운데 244만명이 취업 후 1년 3개월 안에 첫 일자리를 그만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퇴사를 했던 이들도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몇 달 이내에 다시 취업을 하게 된다. '위법, 위험한 근무환경을 가까스로 버텨내거나, 도망치듯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오늘날 한국의 많은 청년들에게 워킹푸어의 처지는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와도 같다.

청년 워킹푸어의 직무 소진감과 이직률을 높이는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반복되는 과로(야근)와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근무환경이다. 청년유니온의 연구에 따르면 주5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수행하거나 일터에서 비인격적인 대우나 따돌림 등을 경험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에 비해 직장 생활 만족도가 낮고 직무 스트레스를 훨씬 더 강하게 느낀다. 임금수준이나 고용형태와 직무 스트레스의 상관관계는 이보다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임금, 업무내용, 계약기간 등 노동의 제반조건을 다루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교부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지만, 한국의 많은 기업들은 근로계약서를 형식적인 문서로 다루고 실제 근무조건을 적용함에 있어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불합리한 업무명령, 근로계약에서 다뤄지지 않는 장시간 노동, 인권 침해 등이 벌어진다. 이와 같은 한국식 기업논리는 세계적으로 급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부당한 초과노동과 인권침해가 벌어지는 근무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정당한 고용계약의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근로계약 내용에 연장·야간 근무에 따른 추가수당을 고정급에 포함시키는 포괄근로계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노동시간에 따라 매달 다르게 책정되는 임금의 산정기준이 기록된 임금명세서의 교부를 의무화하여야 한다. 유럽연합의 기준을 참고하여 퇴근과 출근 사이에 최소휴식시간 제도를 도입하고, 업무시간이 종료된 이후에 전화나 메일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업무지시에 대해 노동자가 '반응하지 않을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1990년대~2000년대 초까지 고용보험, EITC(근로장려세제) 등 실업이나 근로빈곤의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지원하는 정책들을 도입해 왔지만, 저성장이 구조화하고 산업구조와 고용형태가 다변화한 오늘날의 노동시장 현실에 부합하지 않아서 효과성이 크게 떨어진다. 중·장기적으로는 20세기형 노동복지·사회보험 정책의 진입장벽을 개혁하여 21세기형 워킹푸어의 노동권리 실현을 위한 국가보장 체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