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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기회'를 위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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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글 <9호선 출퇴근길의 비애
>에서 이어집니다.

<맞벌이의 함정>을 보면, 미국의 맞벌이 가정이 의외로 파산 신청을 많이 합니다. 빚을 내어 집을 산 이들이 갑작스런 질병이나 실직 이혼 등을 겪으면 순식간에 가계 파탄으로 몰립니다. 무려 87%나 되는 이들이 파산 신청 이유로 실직, 의료문제, 이혼 혹은 별거를 꼽았어요. 잘못된 투자나 신용카드 과소비, 범죄 피해 등의 기타 요인은 다 합해도 13%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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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 질병, 이혼 등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 일이 바로 파산의 원인입니다.

부동산 담보 대출로 매월 이자 갚기도 빠듯한데, 가장이 실직하거나 가족 중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가계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돈 문제로 가정 불화가 생기면 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이때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이 바로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전 남편이 추심원들 등쌀에 양육비도 못 보내주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이럴 때 차라리 전남편이 파산신청이라도 하면, 신용카드 채무를 면제받아 그 돈을 자녀 양육비로 보낼 수 있답니다. 편모 가정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보호 장치거든요.

카드회사의 로비로 이러한 파산법의 조항을 수정하자는 법안이 상정됩니다. 그 법안이 통과될 경우, 이혼한 편모들이 전남편의 소득을 놓고 신용카드 채권 추심원들과 싸워야 합니다. 워런 교수는 <뉴육 타임스>에 이 법안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칼럼을 싣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당시 영부인이던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한번 만나자고 연락을 해옵니다.

1998년 힐러리 클린턴을 만난 워런 교수는 이 파산법안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 법안을 은밀히 미는 중이었어요. 주요 은행들이 로비를 하고 있었고, 클린턴 행정부는 민주당 정권이 재계와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힐러리 여사는 그 '끔찍한 법안'이 통과될 경우, 파산 상태에 놓인 많은 이혼 여성들이 더욱 비참한 지경에 처할 것임을 알아봤어요. 그래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법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남편을 설득합니다. 영부인으로서 제 역할을 한 거지요. 2000년 이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빌 클린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은행 로비스트들은 집요했어요. 클린턴은 퇴임했고, 신용카드 업계는 부시 대통령 후보 선거 캠프에 최대 헌금을 기부합니다. 2001년 봄 파산법안이 새로 상정되었을 때, 초선 상원의원이 된 힐러리 클린턴은 그 법안에 찬성 투표를 던집니다. 자신이 '끔찍한 법안'이라고 부른 그 내용이 별로 달라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부인 힐러리는 그 법안을 막자고 남편을 설득했어요.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말 레임덕이었고 장래 선거운동 기부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새로 시작한 정치 인생에서 든든한 재계의 자금 지원이 필요했어요. 파산 위기에 처한 가정들이 정치 후원금을 내지는 않잖아요? 상원의원 힐러리는 한 해에 은행업계에서 선거기부금으로 14만 달러를 받아 상원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정치헌금을 받는 의원이 되었습니다. 거대 은행과 힐러리는 이제 한 편이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그 '끔찍한 법안'이라고 부른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어요.

미국에서 빈부 격차는 왜 갈수록 심해질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인을 움직일 힘이 없고, 부자들은 그 힘이 있으니까요. 가난한 사람이 백원을 더 벌고자 하는 욕심보다, 부자가 천원을 지키려고 하는 탐욕이 더 크니까요. 그 탐욕의 힘으로 1%를 위한 세상이 굴러가니까요.

미국의 대부업체나 신용카드 업계는 편모 가정이나 소수 인종 가정에 대한 약탈적 대출 영업을 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빚 독촉에 가장 취약하거든요. 비싼 이자를 물고도 '가난해서 빚을 낸 내가 잘못이지, 뭐'하고 체념하기 십상입니다.

정치인들이 재계 로비에 놀아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정치인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표지요. 그들에게 권력을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서민들의 투표.

그들이 채무자나 파산자인 한 그들의 요구는 묵살될 수 있다. 자신들도 막강한 유권자 집단이며, 정치인들에게 존경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집단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재정난에 처한 가정들은 파산한 가정으로서가 아닌 본연의 실제 모습으로 표현돼야 한다. 다시 말해 '어린 자녀들의 부모' '자녀양육비를 지불하는 비동거 아버지' '교외지역 주택소유자' '흑인 중산층 가정' '편모'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있는 가정' '다세대의 중남미계 가정' 등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가정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스스로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

-위의 책 230쪽

지난 1년, 미국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진보며 보수 할 것 없이 유권자들에게 된통 당했습니다. 재계 로비에 휘둘리는 워싱턴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가 선풍을 일으켰어요. '비싼 캠페인 필요없다. 서민들의 한 푼 두 푼 모은 헌금으로 대선을 완주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고 공언한 샌더스, '나는 부자라 기업들에게 돈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 나야말로 미국 백인 중산층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트럼프. 샌더스와 트럼프 열풍 뒤에는 미국 주류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환멸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열심히 일하는 맞벌이 부부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여 스스로의 목청을 높여야 합니다. "무상보육, 어떻게 됐냐? 무상급식, 왜 철회했냐? 반값등록금, 어찌 됐냐?" 하나하나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진 이유를 짚어봐야 합니다. 전셋값 폭등으로 지하철 난민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에 대해 정치의 책임을 따져봐야 합니다.

마침 오늘 정부가 가계부채 대책을 발표하는 날입니다. 4.13 총선이 야당의 승리로 끝난 직후, "금융위, 소액 장기 연체채권 소각 검토 중"이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대표 공약이 "천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채권 즉시 소각"이었거든요. 급증하는 가계 부채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계가 자금을 방만하게 운용한 모럴 해저드의 결과인지, 금융기관 과잉대출의 결과인지, 정부의 시각이 궁금해집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보고 정치인의 모순을 깨닫게 된 엘리자베스 워런은 어떻게 했을까요? 본인이 스스로 나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직접 미국 상원의원이 되었어요. 파산법안을 강의하던 법대 교수가 직접 파산법안을 지키는 수호자로 나서게 된 이야기, 그녀의 정치적 자서전 '싸울 기회'에서 자세히 소개됩니다.

모든 가정에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싸울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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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