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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여, 나는 모로코의 트랜스젠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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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OCCO WOMAN
Juan Medina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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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마단 금식이 끝난 뒤의 식사 시간에 내가 20년 동안 숨겨왔던 것을 가족들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의 아들 함자는 사실은 딸 말라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가족들이 내게 설명할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즐거운 식사는 암울한 장례식 같아져 버렸다. 끔찍한 정적을 깬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끓는 커피 주전자를 나에게 집어던졌다.

오빠는 나를 때려 이를 부러뜨렸고, 테이블에 뛰어올라 나를 주먹으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어머니는 내가 사실은 딸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주먹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어머니의 손을 만져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자기 가족 중에 호모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하며 나를 집에서 내쫓았다.

그 이후 나는 많이 회복했지만, 내가 사는 모로코는 사회적으로 보수적 분위기가 있어 쉽지는 않았다.

15세 때 처음으로 게이와 트랜스젠더 친구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깊은 기쁨을 느꼈다. 그제서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학교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신에게서도 떨어진 개인 주택에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유일한 '일탈자'라는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여성 옷을 입고 유혹적인 이집트 가수 루비처럼 춤춰도 괜찮았다.

어머니 메이크업 상자를 뒤지고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을 살폈던 내가 어린 소녀 시절 이후 처음으로 립스틱을 발라 본 것도 거기였다. 나는 어머니가 결혼식에 갈 때 입는 드레스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공주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다, 어머니가 곧 돌아오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몇 분 만에 옷을 벗고 물로 입술을 문질러 씻었다.

새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마치면 우리는 남성적으로 외모를 바꾸고 밖으로 나왔지만, 나는 카사블랑카의 길을 걸으면서도 춤추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급스러운 마리프 지역의 골목이 텅 빈 것을 기회삼아 모델처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젊은 남성들이 한 무리 나타났다. 내 동행 아유브(그녀는 내가 자신을 캐롤이라고 불러주는 걸 좋아한다)가 말했다. "즈라! 루에어가 온다. 남자처럼 굴지 않으면 쟤들이 너를 때릴 거야."

당시 나는 그런 단어들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이 신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녀에게 더 많이 가르쳐 달라고 했다. "너는 루아바(퀴어)의 말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래야 문제와 구타를 피할 수 있거든. 루에어(동성애 혐오자)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돼. 그들에겐 자비란 없거든."

그녀는 나를 즈비바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즈비바는 내가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알아둘 필요가 있다며 비밀 단어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루에어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콘돔을 쓰는 법, 내 비밀이 들통날 경우 집에서 도망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섹스 파트너를 찾는 법, 내 성격을 하나의 나와 다른 나로 나누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더 조심스러워졌고, 학교에 갈 때마다, 집 주위에서, 집에서 남성용 마스크를 썼다. 하지만 카사블랑카의 공원에 있는 사람들이 젊은 남성들을 찾는 사람들뿐인 시간인 밤에는 나는 퀴어가 되었다. 공원은 성적 접촉이 일어나고 연애가 발전하는 숨겨진 구석이었다.

나는 내게 책임이 있는 것 같은 기분, 혹은 내 소매에 군대 계급이 찍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에는 루아바의 세계는 내게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 지배자들이 1956년에 떠난 이후 계속 내려온 것이었다. 모험, 압제, 마스크 뒤에 숨는 거ㅅ으로 가득한 새로운 퀴어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게이와 트랜스인 우리들의 삶은 우리 도시의 고속도로 옆에 늘어선 오크 나무들 뒤에서의 몇 분 동안의 섹스, 혹은 버려진 집, 섹스 파트너의 옥탑방에서의 섹스를 중심으로 돌았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신발을 벗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동성애는 로맨틱과 섹슈얼한 면에서 같은 젠더의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읽은 글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나는 게이 잡지를 읽었고, 모로코와 레바논의 게이 인권 운동인 키프-키프, 헬렘에 친숙해졌고, 프라이드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즈비바가 내게 가르쳐 준 것과는 달랐다. 즈비바는 퀴어로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이중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LGBT 인권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인권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 삶의 큰 전환이었고, 나는 이런 정보를 다른 루아바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샤드(일탈자)란 단어 대신 미틀리(게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사랑, 자연, 유럽의 게이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흥분해서 내 주위에 모였다. 나는 내가 캐롤과 즈비바와는 다르다고 결론 내리고 그들과 루아바의 세계를 떠났다.

그리고 아랍의 봄이 터졌다. 2011년 2월 20일, 나는 처음으로 수천 명의 젊은 모로코 인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자유, 정의, 존엄, 평등!"을 크게 외쳤다.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다른 활동가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나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정부 건물 앞에서, 수천 명과 함께 한 행진에서 "오늘부터 공포는 없다!"라고 함께 외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서히 내 성적 지향을 밝혔고, 플래카드에 '489조 거부한다'(동성애를 범죄화하는 형법), '사랑을 범죄로 만들지 말라'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5월에는 시위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었는데, 이슬람주의자들은 격분했다. 나는 온몸이 떨렸지만 일어나서 '게이 인권은 인권이다, 우리와 함께 '인민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 중 상당 수가 퀴어이며, 그들도 인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혁명과 해방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나는 다른 게이들도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공원에서 몰래 만났던 사람들, 내가 같이 잤던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변화를 위해 싸우는 그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들은 외모와 정치적 변화에 대한 헌신으로 내가 상상했던 '자연스러운 게이'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나는 철학, 경제, 정치 서적들을 매일 읽게 되었고, 묵주 구슬을 세듯 한 권씩 읽어나갔다. 나는 마르크스,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정치적 믿음 때문에 살해 당한 중동의 활동가인 마디 아멜과 메디 벤 바르카의 책에 푹 빠졌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이런 대목을 찾았다. '나환자, 퀴어, 저항 세력은 사회의 가장 먼 변방으로 조금씩 밀려났고, 그 다음에는 광기의 영역으로 강제로 추방당했다.'

내가 정말로 내 상상대로 '자연스러운 게이'였을까, 아니면 내 주위에 벽을 쌓았던 것일까? 내 동료들을 만족시키고, 그들에게 내가 살 권리가 있다는 걸 믿게 하는 게 내 의무일까?

나는 하비 밀크, '우리는 사회의 문제다, 이제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프랑스 마르크스 주의자들인 혁명 행동을 위한 동성애 전선 Homosexual Front for Revolutionary Action 을 알았다. 그리고 카탈루니아 게이 해방 운동가들이 프랑코 집권 초기에 모로코 탕헤르에서 첫 회합을 가졌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라이드를 선언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에게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자, 나는 하늘을 담요 삼아 축축한 박스를 깔고 자게 되었다. 나는 마음을 사로잡는 가수 파이루즈의 노래를 부르고 쓰레기장에서 찾아낸 트렌스젠더 활동가 실비아 리베라의 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리베라는 1973년 해방절에 뉴욕에서 굉장히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리베라는 관중들을 질책했다. "당신들의 게이 형제들, 게이 자매들이 감옥에 있다! 그들은 내게 일주일마다 한 번씩 편지를 보내는데, 당신들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게이 해방을 위해 구타당했고, 직업을 잃었고, 아파트도 잃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그녀의 말이 내게 희망을 주었고 나를 다시 삶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그녀는 나처럼 모든 것을 다 잃고 뉴욕의 거리를 방황해야 했다. 유일한 차이점은 나는 라밧의 거리를 배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영감과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세상이여, 나는 수염과 구레나룻이 있는 여성이다."

6개월 전에 나는 립스틱을 바르고, 손톱을 검게 칠하고, 진짜 나를 가리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고 붐비는 거리로 나갔다. 하지만 모로코에서는 트랜스젠더가 결코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지만, 나는 구타당하지 않았다. 나의 옷을 벗기거나 땅에 질질 끌고 가지도 않았다. 내가 즈비바의 충고를 신중하게 따르던 때에 비해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모르겠다. 아마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달라졌다 해도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군중 속에서 한 퀴어가 나와 눈을 맞추고 "즈라히메!"라고 비난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오늘부턴 즈라히메 안 할 거야, 자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우울한 감옥 방의 어둠에서부터 젠더 자유의 밝은 햇살로 가는 길을 닦아 준, 감옥에 있는 페미니스트와 퀴어들을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허핑턴포스트US의 World, I'm a Woman with a Beard and Mustach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