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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여행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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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마산행이었다. 40년 전통의 지역 모임 합포문화동인회에서 불러주었다. 근대의 여명기인 1899년에 개항해 나라 밖 문물에 일찍 눈을 뜬 선각(先覺)의 기풍이 남달랐다. 문득 40년 전 겨울의 나를 만난 것은 뜻하지 않은 소득이었다. 이 도시는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장발의 대학 신입생, 다섯 청춘이 처음으로 선택한 가슴 설레는 여행지였던 것이다.

왜 마산이어야 했을까. 이승만 12년 독재를 끝낸 1960년 4·19 혁명을 소환한 3·15 항거의 발원지였고, 박정희 억압통치에 절망하던 시대에 희망의 성소(聖所)였기 때문이었다. 완행열차에 몸을 맡기고 반토막이 된 한반도를 종주해 도착한 첫 행선지는 3·15 의거기념비였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수장(水葬)됐던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의 희생이 눈물겨웠다. 노산(鷺山) 이은상이 객지에서 "내 고향 남쪽바다..."로 시작하는 불후의 가곡 '가고파'의 가사가 되는 시를 쓸 때 귀소(歸巢)의 본능을 깨웠을 가포 앞바다를 구경했다. 전투적 이념보다는 낭만적 이상주의에 기울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과 2년 뒤 이곳에서 분출되는 불가역적 변혁을 짐작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79년 10월 19일 부마항쟁 현장을 목도한 뒤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민란"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딱 일주일 뒤인 10월 26일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쏘았다.

4·19와 10·26의 발화(發火)에는 스무 살의 미숙한 눈으로는 가늠할 길 없었던 전사(前史)가 있었다. 먼저 4·19. 신생 한국에는 능란한 외교로 미국을 다루며 북한의 침략을 물리친 이승만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변변한 산업이 없어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그런데 50년대 후반부터 규모가 격감하면서 실업자가 급증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까지 터져 나왔다.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됐지만 4·19를 격발시킨 뇌관은 경제난이었다.

10·26으로 박정희가 무너지게 되는 첫 신호는 미국령 괌에서 들려왔다. 69년 7월 25일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던 것이다. 격렬한 반전운동에 직면한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철수가 시급했다. 베트남을 지원한 중국과 손을 잡으려 키신저와 닉슨이 만리장성을 넘었고,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다. 71년 미군 2만 명이 한국을 떠났고, 다음해 미·중은 반패권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미군이 빠져나간 베트남은 75년 공산 세력에 패망했다.

동맹국 미국을 위해 5만 명의 병사를 베트남에 파병했던 박정희는 배신감과 공포를 느꼈고, 독자 핵무장을 추진했다. 72년 미국의 종용으로 대화에 나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석 달 만에 강력한 독재를 위해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갈수록 경제성장률은 추락하고 갑작스러운 부가세 도입으로 물가상승률은 치솟았다. 미국과의 충돌, 내부의 저항 속에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은 예고돼 있었다.

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가 끝나면 시진핑 권력이 강화되면서 미·중 세력 재편으로 한반도 정세는 요동칠 것이다. 93세의 키신저는 이미 트럼프와 시진핑을 향해 '북한 붕괴 이후 주한미군 철수'라는 빅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닉슨 행정부에서 미·중 화해를 주도하는 와중에 베트남을 희생시킨 전력이 있는 그가 지금은 트럼프의 귀를 잡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념과 도덕보다는 현실정치(Realpolitik)를 중시한다. 한국이 베트남처럼 희생될 수 있다는 박정희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밝은 눈으로 대처해야 한다. 김정은은 극단적인 위협을 거듭하고 있는데 강대국의 흥정으로 국익과 안보가 도매금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 다음달 트럼프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구멍이 숭숭 뚫린 한·미 관계가 복원돼야 한다. 이념과 진영으로 분열된 국내 여론도 결집돼야 한다.

마산 '팔도잔디'는 화합의 모범이다. 가장 먼저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한일합섬이 74년 국내 최초로 세운 산업체 부설학교 한일여자실업학교(현재는 일반고인 한일여고)에 심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소녀들이 추석 때 고향서 가져온 한 줌씩의 잔디로 조성했다. 함께 바라보면서 서로를 눈물로 위로하고 고된 노동과 학업을 병행했다. 합포문화동인회의 조민규 명예이사장은 "고(故) 김한수 회장은 하루 12시간 일하는 2교대를 8시간 일하는 3교대로 바꿔 공부시켰다"고 했다. 팔도잔디는 고난과 성취가 교차한 박정희 산업화 시대 화합의 상징이었다.

귀로에 한반도의 운명을 생각했다. 표변하는 강대국 틈새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갈라진 국론의 자발적 결집을 이뤄내야 한다. 팔도잔디는 정의와 저항의 도시 마산을 관용과 화합의 진정한 성소로 승화시켰다. 시대를 앞서온 마산, 이 정도면 가을의 여행지로 충분히 매혹적이지 않은가.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