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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Headshot

'섬나라' 탈출 방정식 연해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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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VOSTOK
ASSOCIATE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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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가쁜 숨을 몰아쉬던 대한제국의 간절한 구조 요청을 외면한 제정러시아의 냉소가 한국에 구애(求愛)하는 절박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각계의 지성이 러시아 연해주를 탐방하는 5박6일(8월 8~13일)의 평화 오디세이 여정은 한 세기 만에 역전된 한·러 관계의 현주소를 확인시켜 주었다. 놀라운 역사의 변주(變奏)다.

러시아 극동 개발 최고 책임자인 트루트네프 부총리는 "북한과 인접한 지역에 여러 개의 (개성)공단을 동시에 만들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럽연합(EU)과 미국의 제재로 유럽을 잃은 러시아는 2025년까지 22조 루블(약 380조원)을 극동에 퍼부을 계획이다. 신범식 서울대 교수의 진단대로 러시아는 글로벌 차원에서는 미국과 대립하면서도 극동에서는 팽창하는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인 한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한 이중적 상황이다.

한국으로서도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은 중국 의존도를 줄일 수 있고, 북핵이 촉발한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를 완화시킬 좋은 카드다. 제2, 제3의 개성공단의 씨앗을 뿌려놓으면 연해주는 남·북·러·중과 일본이 손을 맞잡는 평화의 중심지로 태어날 것이다. 물론 확고한 한·미 동맹이 대전제다. 사흘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제2회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박근혜 대통령의 표정에 러시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제 강국인 '매력 한국'의 힘이다.

1856년부터 건설된 극동의 관문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뜻하는 '보스토크(Vostok)'와 '지배하다'는 뜻의 블라디(Bladi)를 합친 고유명사다. 고종 황제가 1910년 6월 일제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방 지배'의 도시로 망명하려 한 것은 비극적 역사의 아이러니다. 고종은 간도 관리사 이범윤과 함경도 의병의 도움을 받아 절명(絶命) 직전의 대한제국을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래서 대위 현상건과 서북학회 간부 이갑을 상하이의 러시아 상무관 고이에르에게 보내 망명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이를 거부했다. 고종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에는 전시 국외중립을 선언했고, 1907년에는 헤이그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파견해 을사늑약의 강압성을 폭로하고 파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열강은 약소국 대한제국을 외면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옛 모습 그대로여서 소멸해 가던 대한제국의 그림자도 지워지지 않았다. 낯선 도시를 항일의 거점으로 삼으려 한 고종, 헤이그로 떠나는 이준과 이상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는 안중근이 어른거렸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외세의 국권침탈은 국제 정세에 대한 조선의 무지(無知)와 무력(無力)의 결과였다. 철석같이 믿었던 조미수호조약 체결국 미국은 몰래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조선을 넘겨버렸다. 망명을 갈구하던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한일합병 반대를 호소할 때 러시아는 이미 러일협약을 통해 일본이 원하는 조선을 버린 상태였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조약과 우정은 버림받은 자의 처연한 연서(戀書)임을 역사는 웅변한다.

한 세기가 지났고, 한국을 향한 러시아의 러브콜은 달콤하다. 푸틴이 주재하는 동방경제포럼의 1순위 귀빈은 아베가 아닌 박 대통령이다. 일각에선 한국인에게 러시아인 지위를 부여해 극동 진출을 유도함으로써 중국의 팽창을 막자는 구상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 세기 전 러시아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우리가 러시아를 외면하면 상황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이 아닌 중국을 파트너로 선택할 것이다. 이는 한반도가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신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최악의 상황을 의미한다.

푸틴의 신동방정책과 시진핑의 일대일로, 21세기 인류문명과 산업의 향방을 바꿀 북극 항로의 강한 기운이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만나는 곳이 연해주다. 여기서 평화와 공존의 모델을 만들면 한국은 동아시아 지중해의 허브 국가가 될 것이다. 중·러 대륙세력과 미·일 해양세력의 가교가 되는 반도성을 회복하면 핵을 가진 북에 가로막힌 '섬나라'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나라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연해주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손을 잡고 북한 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높이는 것은 북핵 위기를 해소하는 생존 방정식이 될 수 있다. 동맹국 미국을 이해시키고 일본을 끌어들이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전란과 망국의 치욕을 씻고 동북아 평화의 주역이 되려면 우리의 매력을 주변국과 공유하는 대범한 전략과 결단이 필요하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