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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러브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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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TIN
ASSOCIATE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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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는 요즘 클래식의 선율에 도시 전체가 흠뻑 젖어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마린스키 극장의 총감독인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예술감독을 맡아 지휘하고 있는 제1회 마린스키 국제 극동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골드혼만(灣)의 마린스키 극장과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기함인 바랴크함에서 환태평양 국가의 연주자와 무용수들이 음악회와 발레공연을 펼치고 있다. 한국인 참가자로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손열음과 발레리나 이수빈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한국과 러시아가 음악을 매개로 가까워지고 있는 장면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음악계의 차르'로 불리는 게르기예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다. 신동방정책을 기치로 내걸고 극동개발에 러시아의 명운을 걸고 있는 푸틴은 게르기예프를 앞세워 블라디보스토크에 공연장을 만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미 존재하는 마린스키 극장의 이름을 사용하게 했다. 극동개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한국인 연주자와 무용수가 유난히 많이 참가한 것은 게르기예프가 평창 대관령 음악제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페스티벌의 숨은 코드는 한국에 대한 푸틴의 강력한 러브콜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럽과 단절된 러시아의 활로를 극동에서 찾으려는 푸틴의 의욕은 곳곳에서 꿈틀거린다. 푸틴은 신동방정책을 기치로 극동개발부를 만들고 10개 선도개발구역(TOR)을 지정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15개 항구를 자유항으로 선정했다. 선도개발구역 사업자는 첫 5년간 연방 소득세·재산세·토지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토지와 인프라는 무상이다. "완전 개방"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파격적인 조치다. 러시아가 유럽의 부재(不在)를 극복하기 위해 진짜로 손을 잡고 싶은 나라는 한국이다.

중국이 13억 인구와 우월한 경제력을 앞세워 밀고 들어오는 상황은 극동 전체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한 러시아로서는 경계의 대상이다. 북극항로 개발의 전초사업으로 중국이 동북 3성의 훈춘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나 자루비노항을 철도로 연결하자고 제안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시큰둥하다. 일본도 아베가 푸틴을 달래고 있지만 미국과 손잡고 중·러를 봉쇄하는 구도에 선 데다 쿠릴열도 4개 섬을 놓고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어 껄끄러운 사이다. 반면에 한국은 군사적 위협 요인이 없고 첨단기술을 갖춘 제조업 강국이어서 경제적으로도 최적의 파트너가 된다. 땅이 넓고 자원은 많은데 인구가 적고 기술이 부족한 극동러시아의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여 년간 중국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한 결정적인 요인이 한국과의 협력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인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탈출구라는 점에서도 한국은 러시아에 너무도 간절한 카드다.

몸이 달아 있는 러시아의 손을 잡는 것은 한국에도 이익이 된다. 무엇보다 중국 일변도의 경제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브렉시트로 타격을 받은 유럽 지역으로의 중국 수출이 타격을 받게 되면서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해 온 한국엔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당장의 성과는 어렵지만 러시아가 블루오션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미 양국 전문가 사이에선 활발한 논의가 오가고 북·러 접경에 제2의 개성공단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러시아가 땅을 제공하고 한국의 기술이 투입되면 북한의 인력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다. 개성과 달리 물과 전기가 풍부하고 전략물자 통제도 받지 않아 정보기술(IT)과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산업 유치도 가능하다. 한·러 협력을 통해 꽉 막힌 남북관계도 풀리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달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하고 푸틴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한·러 경제협력을 위해서는 러시아도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 핵을 제재하는 데 보다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박 대통령은 2013년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부산~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유라시아 철도 연결을 포함하는 자신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푸틴의 극동개발 비전이 시너지를 이루면 동북아 평화협력이 가속될 것이라고 했다.

두 정상이 의기투합하면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재가동해 천혜의 부동항인 나진항을 극동러시아와 중국 동해 루트의 거점으로 개발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나진이 동북아 교역 허브가 된다. 동해는 한반도 주변 4강이 각축하는 갈등의 바다에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지중해로 바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국가가 되려는 러시아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 한국과는 안보와 경제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1000년 전 발해의 고토(古土)였고, 100년 전 안중근·이상설 ·최재형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선율에 담겨 날아온 러브콜을 놓쳐선 안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