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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유령선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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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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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파의 하나인 퀘이커 교도였던 함석헌 선생의 한국전쟁 체험기다. 대구의 큰 교회에 피란민이 몰려갔는데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안 받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기독교인 먼저 받자"고 하더란다. 와중에 슬쩍 들어가려고 협잡하는 이까지 생겨났다. 그러자 교회는 진위를 가려내기 위해 주기도문을 외우는 시험을 치르게 했다. 선생은 50년 뒤 "주기도문이 그런데 쓰라고 가르쳐 줬을까"라고 일갈했다.

한국전쟁은 수백만 명이 희생된 지옥의 체험이었다. 양반이라고 큰소리치던 사람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으려고 막일을 하거나 깡통 들고 구걸에 나섰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교회는 구원의 수단인 기도문을 차별의 무기로 썼다. 돈도 '빽'도 없는 민초들은 피란열차에 자리가 없어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 떨어져 죽었는데 고관들은 피아노와 응접세트에 개밥 그릇까지 실었다. 인간의 위엄을 지켜주는 염치와 도덕은 설 자리를 잃었고, 돈과 권력이 양대(兩大) 신(神)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63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심리적 피란민으로 살고 있다. 돈이나 권력이 없으면 빌붙기라도 잘해야 산다는 강박이 지배하고 있다. 5년간 239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그걸 깨우쳐 주었다. 생존 피해자들은 '안방의 세월호 사건'으로 부르는데, 적절한 명명(命名)이다. 304명을 수장(水葬)시킨 세월호는 2시간 반 만에 침몰했고, '안방의 세월호'는 22년에 걸쳐 서서히 가라앉았다. 1994년 국내 업체가 세계 최초로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한 이후 사고를 막을 일곱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정부는 다 놓쳤다. 그래놓고도 환경부 장관은 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국민은 지금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인 옥시로부터 뒷돈을 받고 유리한 의견서를 써 준 혐의로 구속된 교수는 옥시의 법률 대리인인 대형 로펌이 왜곡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옥시가 대형 로펌의 자문을 받아 검찰에 제출한 77쪽짜리 의견서에는 "봄철 황사와 꽃가루가 사망자 폐질환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적혀 있다. 첫 사망자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나도록 검찰은 수사에 나서지 않았고, 언론은 절규하는 피해자들을 보고도 침묵했다. 돈과 권력, 전문지식을 가진 집단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부조리극이었다.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반성한다.

돈과 권력의 난폭한 질주는 지금도 그치지 않는다. 오너 기업인들은 경영난으로 쓰러져가는 회사에서 돈을 빼 내 혈족의 '일감 통행세'를 챙기는가 하면 폭락 직전의 주식을 남몰래 팔아치웠다. 이렇게 염치 없이 달려들어 수십억원씩 집어삼키면서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 회사를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 수 있는가. 요즘 잘나가는 로펌들은 힘 있는 부모를 보고 전략적으로 채용한 로스쿨 출신 금수저 변호사들을 부모가 힘이 빠진 뒤 내보낼 수 없어 고민 중이라고 한다. 나만 살기 위해 염치와 도덕을 버린 피란시절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렇다면 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까. 1인당 소득 700달러의 세계 최빈국 네팔의 '라면왕'인 억만장자 비놋 초드리는 지난해 4월 강진이 발생하자 사재를 털어 이재민에게 가옥 1만 채를 지어주었다. 그는 "어떤 사회에서 축적한 부(富)라면 그 사회를 위해 쓰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시애틀시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내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기로 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억만장자인 IT 벤처기업가 닉 하나우어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다른 도시들도 시애틀의 영향을 받아 최저임금을 올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기업가 겸 시민운동가를 자처하는 그를 "저항적 억만장자(billionare heading to barricade)"라고 부른다. 번 돈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사회주의 억만장자(socialist billionare)"라고도 불린다. 그는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며 법인세 증세에 찬성한다. 이들은 "내 배만 불리겠다"며 피란시절에 머물고 있는 한국의 천민(賤民) 자본주의를 조롱하고 있다.

15세기 후반에 열린 대항해시대의 바람은 곧 생명이었다. 바람이 사라진 바다의 범선(帆船)은 꼼짝도 할 수 없어 굶어죽은 선원들의 해골이 뒹구는 유령선이 되곤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1492년 신대륙 항해를 끝내고 귀환하던 콜럼버스가 20일간의 고투 끝에 빠져나왔던 사르가소해(海)의 무풍지대에 갇힌 신세가 아닐까. 그렇다면 민심의 정권 심판으로 탄생한 20대 국회는 어떻게든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시민이 나서 돈과 권력의 몰염치한 카르텔을 부수고 새로운 규칙을 정해 반칙왕을 링에서 끌어내릴 수밖에 없다. 그게 대한민국이 거대한 유령선으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하는 길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