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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탄생기의 진화: part 1 | 반영웅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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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30] 배트맨 탄생기의 진화: part 1

─ 반영웅의 탄생


1930년대

배트맨-브루스 웨인이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1939년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였다. 하지만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슈퍼 히어로가 되었는지에 관한 탄생기가 처음부터 소개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히어로들이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그 트라우마가 히어로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하는 섬세한 부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이 고담 시 경찰국장 제임스 고든과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범죄 소식을 듣고는 배트맨으로 변장하고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면 족했다. 근사한 옷을 입은 캐릭터가 무서운 악당에 맞서 놀라운 무기를 선보이고, 감탄할 만한 기지와 판단력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슈퍼 히어로 만화의 골든 에이지는 1980년대 『이어 원』이나 최근의 『제로 이어』 같은 히어로의 성장기가 아니라,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처럼 원숙한 경지에 이른 슈퍼 히어로의 이야기로 이루어 낸 것이었다.

그러다가 1939년 11월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에서 브루스 웨인의 어린 시절에 관한 2페이지의 짤막한 탄생기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75년 동안 배트맨 탄생기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영화를 본 후 집으로 돌아가던 웨인 가족, 그 앞에 나타난 권총 강도, 브루스의 어머니가 걸고 있던 목걸이, 강도의 총구 앞을 막아선 아버지, 연기를 내뿜는 총구, 쓰러진 아버지 토머스 웨인,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 마사 웨인(당시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부모의 죽음을 눈을 목격한 소년, 범죄와 싸우겠다는 맹세, 자경단 준비 과정, 밤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고민, 집안으로 날아든 박쥐, 배트맨의 탄생 등은 모두 이후 배트맨 작가들이 다루게 되는 탄생기의 핵심 요소들이다.


1940년대

그 이후에 나온 탄생기는 1948년 6월 《배트맨》 47호다. 커버에는 "배트맨의 탄생기"를 밝힌다고 제목이 박혀 있고, 소년 브루스 웨인이 든 《고담 가제트》 헤드라인에는 '토머스 웨인이 수수께끼의 살인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헤드라인까지 적혀 있어서 독자의 기대를 잔뜩 불러일으켰다. 아쉽게도 이 이슈의 탄생기는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와 비교해서 길이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몇 가지 바뀐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33호에서 권총 강도는 토머스 웨인을 쏜 후에 저항하는 마사 웨인도 닥치라고 하면서 쏴 버리는데, 47호에선 마사 웨인이 남편이 죽자 충격을 받아 심장 마비로 쓰러졌다고 나온다. 또한 어린 브루스 웨인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 할 말을 잃고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강도를 무섭게 노려보며 그 얼굴을 절대 잊지 않겠다면서 다짐하고 부모의 묘비 앞에서도 범죄자를 심판대에 세울 것임을 맹세한다. 죽음의 원인을 심장마비로, 사적 복수 대신 정의의 심판으로, 심약한 꼬마를 당당한 소년으로, 강도를 어린 브루스의 눈빛에 겁을 먹을 정도로 나약한 이미지로 바꿔버린 것 등은 모두 사이드킥 '로빈'이 등장하며 어린 독자들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그에 맞춰 수위 조절을 한 것이었다. 이 이슈에서 배트맨의 복수는 부모님의 원수인 조 칠이 다른 악당의 총에 맞고 사망하면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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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브루스 웨인. 《배트맨》 47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47?file=Batman_47.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1950년대

그 다음 탄생기로는 1955년의 《디텍티브 코믹스》 226호 버전이 있는데, 이것은 이전 두 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야기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범죄 수사에 관심이 많았던 브루스 웨인이 평소에 존경하던 형사 하비 해리스에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처음 로빈 코스튬을 입었던 때를 그린다. 이때 입었던 로빈 코스튬을, 훗날 배트맨이 되어 딕 그레이슨이라는 고아 소년을 거두어들인 후 물려 주었다는 설정이다. 당시의 소년 히어로를 분류해 보면 성인 히어로 곁에서 조수로 일하는 로빈 같은 소년 히어로가 있었고, 샤잠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 성인 히어로 캡틴 마블로 변신하는 빌리 뱃슨과 같은 소년이 있었고, 그리고 성인 히어로인 슈퍼맨의 어린 시절 버전인 슈퍼보이 같은 식으로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이것은 슈퍼보이류로 배트맨을 발전시킨 것에 해당되었다.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기 전 이야기가 훌륭한 흥행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DC에서는 이듬해인 1956년 《디텍티브 코믹스》 235호에서 아예 브루스의 아버지 토머스 웨인을 '최초의 배트맨'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어느날 브루스와 딕은 토머스 웨인의 옛 책상에서 박쥐 코스튬을 발견한다. 브루스는 배트맨의 영감을 받은 계기가 방 안에 들어온 박쥐를 본 것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배트맨이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같이 들어 있던 낡은 필름을 재생해 보니 토머스 웨인이 가장 무도회에서 박쥐 의상을 입은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경연장에 갱들이 나타나서 부상을 입은 갱단 두목 루 목손을 치료해 줄 의사를 찾는다. 박쥐 의상을 입은 채로 경황도 없이 끌려가긴 했지만, 토머스 웨인은 일단 의사로서 목손을 치료한 후 놀라운 무술 솜씨로 갱단을 제압하고 목손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목손은 출소 후에 토머스 웨인 부부를 살해하도록 조 칠을 사주했던 것이다. 진실을 안 브루스는 아버지의 옛 코스튬을 입고 목손을 찾아가 자백을 받으려 하는데, 겁에 질린 목손은 도망치다가 트럭에 치여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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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로빈. 저 낡은 배트맨 코스튬을 입은 사람은 내 아버지야!" 배트맨의 집안 내력(?)이 밝혀진《디텍티브 코믹스》 235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235?file=Detective_Comics_235.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1960년대

1969년 《배트맨》 208호에는 뉴52 배트맨 『제로 이어』2부작을 읽은 독자라면 친숙할 필립 케인이 등장한다. 토머스 웨인이 조 칠의 총에 맞아 죽고, 마사 웨인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고, 조 칠의 얼굴을 노려보았던 브루스 웨인의 보호자가 된 사람은 그의 삼촌인 필립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상 여행을 자주 다녀야 했기 때문에 가정부인 칠턴 여사가 브루스를 돌본다. 부모님의 장례식 날 무덤가에는 필립과 칠턴이 동행했고, 거기서 브루스 웨인이 부모님을 죽인 자에게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브루스 웨인은 이들의 보호 아래 대학까지 무사히 졸업한다. 칠턴 여사는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늘 엄마처럼 곁에서 브루스를 챙겨 준다. 하지만 그 뒤에는 충격적인 비밀이 숨어 있었다. 사실 그녀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아들은 브루스의 부모를 죽인 조 칠이었고, 다른 아들인 맥스 역시 배트맨과 싸우다가 사고로 죽은 범죄자였던 것이다. 칠턴 여사는 범죄자로 살다가 비참히 죽어야 했던 아들을 슬퍼하면서도 브루스를 원망하진 않는다. 어쨌건 이렇게 해서 배트맨이 부모를 잃은 후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윤곽이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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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52 배트맨 월드에 다시 나타난 필립 케인. 『제로 이어: 비밀의 도시』에서.
(사진 제공: 세미콜론)


1970년대

1939년부터 1969년까지 거의 30년간 배트맨 이야기는 하나의 뼈대에 조금씩 살을 붙이면서 발전을 하였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화 작가들은 초기 배트맨의 다크함을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를 위해서는 새로운 살을 붙이는 것도 필요했지만 먼저 1940년대에 수위를 조정했던 부분을 원상 복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1976년 《디텍티브 코믹스》 457호에서는 부모가 살해된 직후 경찰이 도착하고 보호자에게 넘겨질 때까지 브루스가 견뎌야 했던 아픔의 시간들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루었다. 웨인 부부는 모두 강도의 총에 살해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브루스가 강도를 노려보며 외치던 장면도 생략된다. 대신 부모의 시신 앞에서 '침묵의 비명'을 지르면서 계속 눈물만 흘리던 모습을 부각시킨다. 경찰과 기자들이 도착하는데, 그들은 모두 주검이 되어 버린 고담의 유명인사에만 관심이 있고, 충격에 빠진 브루스의 마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때 한 여성이 브루스의 양 어깨를 잡고 말을 건네는데, 바로 레슬리 톰킨스다.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시간을 건너뛰어서 성인이 된 브루스가 배트맨으로 활동하는 시대로 넘어온다. 배트맨은 부모가 죽은 크라임 앨리에서 톰킨스를 다시 만난다. 배트맨이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묻자, 배트맨의 정체를 모르는 톰킨스는 예전에 부모를 잃은 한 소년을 보았으며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평생을 바치며 살아왔다고 대답한다. 크라임 앨리에 희망이 없다고 믿었던 배트맨은 그녀를 보고 희망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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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임 앨리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 레슬리 톰킨스. 『배트맨 앤솔로지』에서.
(사진 제공: 세미콜론)


1980년대

여기까지의 모든 내용을 총 정리하는 만화가 1980년 《언톨드 레전드 오브 배트맨》 미니 시리즈다. 이 미니시리즈는 1979년 DC에서 슈퍼맨이 지구로 보내지기 전 크립톤 행성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월드 오브 크립톤》이라고 하는 3이슈짜리 미니시리즈가 반응이 좋자 배트맨 시리즈에도 같은 포맷을 적용하여 40년간 다듬어 왔던 배트맨 탄생기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이야기는 토머스 웨인이 배트맨 코스튬을 입고 목손을 경찰에 넘기던 이야기에서부터 연대기순으로 진행된다.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다가 풀려난 목손은 조 칠을 고용해서 웨인 부부를 죽인다. 현장에서 레슬리 톰킨스가 어린 브루스를 위로해 주었고, 이후 그는 필립 삼촌과 함께 부모의 장례를 치른 후에 삼촌의 집에 가서 가정부 칠턴 여사를 만난다. 브루스는 부모의 묘지 앞에 홀로 가서 범죄와의 전쟁을 맹세하고, 칠턴 여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학업과 신체 단련에 매진한다. 그러던 중에 평소에 흠모하던 형사 하비 해리스를 만나기 위해서 로빈 코스튬을 입게 되었고, 그를 첫 스승으로 삼아 많은 것을 배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범죄학을 전공, 심리학을 부전공하였으나 수업 중에 법과 정의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범죄와 싸우려면 자경단 활동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배트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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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가 이 책에 있다고!" 40년 동안의 배트맨 탄생기를 모아 일관성 있게 정리한《언톨드 레전드 오브 배트맨》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Untold_Legend_of_the_Batman_Vol_1?file=Untold_Legend_of_the_Batman_1.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