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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과 싸우는 뱃신 | 배트맨의 초자연적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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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18] 사신과 싸우는 뱃신

─ 배트맨의 초자연적 적들


한국의 배트맨 만화 팬이라면 익히 들어보았을 작품이 있다. 국내에 최초로 정식 출간된 배트맨 그래픽 노블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악십', '악멘'(악십+아멘)이라는 약어로 더 유명한 『배트맨: 악마의 십자가』이다. 제목 그대로 이 이야기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능력 없는 인간이 범죄자들과 벌이는 전쟁이라는 배트맨 스토리에 익숙한 팬이라면 왜 이런 황당한 설정으로 배트맨의 사실성을 망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75년을 넘는 긴 역사에서 악령,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다루어진 초자연적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는 배트맨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다. 특히 1970년대는 배트맨 시리즈를 호러물과 절묘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오늘날 배트맨이 갖고 있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바탕을 탄탄하게 이룩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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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유독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배트맨: 악마의 십자가』표지.

(사진 제공: 세미콜론)


불사의 존재

첫 예로 《디텍티브 코믹스》 395호의 '파 놓은 무덤의 비밀'(『배트맨 앤솔로지』에 수록)을 보자. 1950~1960년대의 코믹하고 우스꽝스러웠던 이미지를 탈피하고 어두운 다크 나이트로 돌아가려 했던 1970년대 배트맨 시리즈의 효시격인 이 작품은,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을 소재로 삼아 독자들을 공포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이야기의 배경은 멕시코의 무에르토 성. 성주인 무에르토 부부가 개최한 공동묘지 테마의 파티에 브루스 웨인도 참석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브루스 웨인은 두 사람이 '시빌 꽃'이라는 신비의 힘을 이용해 젊은 육체를 유지한 채 120년을 넘게 살아 온 불사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토리 작가 데니스 오닐과 만화가 닐 애덤스가 최초로 콤비를 이뤄 미국 만화의 역사에서도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 작품에서, 무에르토 부부가 원래의 늙은 육신으로 변해 최후를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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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고딕풍으로 그려진, 환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당들이 등장하는 '파 놓은 무덤의 비밀'중 한 장면.

(사진 제공: 세미콜론)


배트맨판 지킬 박사 - 맨배트

'파 놓은 무덤의 비밀'과 같은 해인 1970년 여름 《디텍티브 코믹스》 400호에서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한 인물이 외모부터 마음까지 점점 괴물로 변해 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닮은 새로운 캐릭터가 하나 등장한다.

배경은 '고담 자연사 박물관'.(『배트맨: 제로 이어』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박쥐 전문가인 하비 랭스트롬 박사는 위대한 배트맨도 가지지 못한 박쥐 본연의 힘을 열망한다. 그는 박쥐를 이용해 인간의 감각을 초인적인 수준으로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고 박쥐에서 뽑아낸 성분을 자신의 몸에 투여하는데, 어둠 속에서도 볼 있는 시력과 놀라운 청력을 얻은 대신 온몸이 점점 박쥐로 변해 가는 부작용을 겪으며 인간 박쥐 맨배트가 된다.




배트맨과 악령들

역시 같은 해에 출판된 《배트맨》 227호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고대의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악마 숭배자들이 배트맨의 적으로 등장한다. 이 이슈는 표지부터 상징적으로, 배트맨 역사상 최초로 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가 등장했던 《디텍티브 코믹스》 31호를 오마쥬하고 있다. (《디텍티브 코믹스》 31호에 관해서는 연재글 '배트맨의 첫사랑 - 줄리 매디슨'에서 소개한 바 있다.) 줄거리는 조카 다프네가 히슬로우 성의 가정교사가 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알프레드가 브루스 웨인에게 이를 직접 확인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이윽고 배트맨은 무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다프네는 10월 30일 자정에 태어난 여성을 악마 부활의 제물로 쓰려는 성주 클리프턴 히슬로우가 가정교사로 채용하는 척하며 감금한 것이었다. 흑마술사와 난쟁이로 구성된 악마 숭배자들이 그녀를 산채로 죽이려 하는 과정에서 다프네와 똑같이 생긴 정체불명의 여인이 배트맨을 돕는데, 그녀의 정체 역시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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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의 세월을 넘어 《디텍티브 코믹스》 31호를 오마쥬한 《배트맨》 227호 표지.

(이미지 출처:
왼쪽,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31?file=Detective_Comics_31.jpg
오른쪽,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227?file=Batman_227.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낫을 든 저승사자

검은 로브를 입고 대낫을 든 서양판 저승사자인 리퍼 또한 배트맨의 상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 저승사자는 아니고 그 모습을 가장한 인물이긴 했지만, 이는 공포물 캐릭터가 배트맨 시리즈에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초자연적 존재의 이야기 외에도 전설 속 괴물과 악령으로 가장한 악당들의 사건이 많아진 것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971년 《배트맨》 237호에서 리퍼의 옷을 입고 살인을 저지르는 그뤼너 박사는 과거 나치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은 후에 평생을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 온 인물이다. 그는 당시 '도살자'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쳤던 수용소장 슐로스에게 복수하려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배트맨과 대결하게 된다. 훗날 리퍼는 그뤼너 박사가 아닌 다른 인물의 버전으로도 등장하지만, 그뤼너 박사는 마블의 매그니토와 더불어서 그 탄생에 나치 수용소가 작용한 대표적인 빌런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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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비극으로 인해 태어난 악당 리퍼. 그가 처음으로 등장한 《배트맨》 237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237?file=Batman_237.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리퍼와 닥터 데스

그런데 리퍼는 곧 한국에도 정식 출간될 예정인 배트맨 시리즈의 최신작 『제로 이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제로 이어』 스토리 아크의 한 이슈인 뉴 52 《배트맨》 26호 표지는 고담 시의 검은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닥터 데스의 거대하고 하얀 손가락뼈가 땅에서 솟아나와 있는 모습이다. 또한 『제로 이어』의 스토리는 나무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형적으로 뼈가 돋아나, 마치 나무에 매달린 듯한 모습으로 죽은 시신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971년의 《배트맨》 237호 역시 이 구부러진 손가락뼈와 흡사한 모습의 마른 고목과 거기에 못 박혀 죽어 있는 배트맨의 시신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또한 『제로 이어』에서 배트맨과 대면해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닥터 데스의 모습은 237호에서 거대한 낫을 들고 배트맨에게 과거의 일을 설명하는 리퍼의 모습과 닮아 있다. 원래 닥터 데스는 1939년 《디텍티브 코믹스》 29호에 등장한 배트맨 역사상 최초의 미친 과학자다. 뉴52의 닥터 데스는 이 원조 닥터 데스의 이름 위에 금단의 약물을 통해 스스로 괴물로 변해 버린 '지킬박사와 하이드'류의 이미지를 덧칠하고, 그 위에 다시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인물이 자신만의 정의에 따라 복수를 추구하는 1970년대 리퍼의 이미지를 더함으로써 태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늑대 인간

1974년 《배트맨》 255호 '늑대의 달' 편은 1930년대의 고전 공포 영화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사건의 발단은 배트맨의 적인 아킬레스 마일로 교수가 고질적인 두통에 시달리던 육상 10종 경기 선수 앤서니 루퍼스에게 치료제로 건네준 약병이었다. 이 약을 마신 루퍼스는 밤이면 피에 굶주린 늑대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마일로 교수는 해독제를 만들어 주겠다면서 루퍼스에게 배트맨을 죽이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배트맨은 쇠꼬챙이를 심장에 찔러 넣어도 죽지 않는 늑대인간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게 된다. 늑대인간 루퍼스는 이 이야기 이후에 알래스카로 떠나 늑대 무리와 함께 사는데, 훗날 1981년에 그의 여동생이 백혈병에 걸려 골수 이식이 필요하게 되자 배트맨이 루퍼스를 알래스카에서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로 다시 한 번 등장했다. 앤서니 루퍼스의 이야기는 앞서 소개한 맨배트와 함께 1990년대 「배트맨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에서도 나오는데, 애니메이션판의 이름은 앤서니 로물루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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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는 불사의 늑대인간에게 배트맨은 승리할 수 있을까?《배트맨》 255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255?file=Batman_255.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뱀파이어

골든 에이지 시대 《디텍티브 코믹스》 31호와 32호에서 배트맨이 뱀파이어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큘라와 제대로 결전을 벌인 것은 1976년 《디텍티브 코믹스》 455호가 처음이었다. 『그린 애로우 롱보우 헌터스』의 작가 마이크 그렐의 초기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여행 중 자동차가 고장난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가 냉각수로 쓸 물을 찾아 근처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집안에는 큰 조명이 비추고 있는 관이 있었는데, 브루스가 실수로 조명을 꺼뜨리면서 관에서 뱀파이어가 깨어난다. 영리한 배트맨은 부서진 나무 조각으로 만든 십자가로 뱀파이어를 주춤하게 한 후 가슴에 말뚝을 꽂지만, 뱀파이어는 자신의 심장이 그곳에 있지 않다면서 살아나 배트맨을 공격한다. 이 뱀파이어의 정체는 100여 년 전 심장 이식 수술을 연구하다가 강단에서 추방된 구스타프 데코브라 교수였다. 의료계의 이단아로 몰린 교수는 어쩔 수 없이 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하여 몰래 연구를 계속했는데, 실수로 뱀파이어의 관을 여는 바람에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한다. 싸움 중에 데코브라는 그림 속에서 삽을 끄집어내서 무기로 쓰는 등 뱀파이어만의 신비한 능력들을 선보인다. 이 이슈를 통해서 주목을 받은 마이크 그렐은 1977년 《배트맨》 287호부터 배트맨의 정규 작가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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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뱀파이어가 숨겨둔 심장을 찾아 그를 퇴치하려는 배트맨. 《디텍티브 코믹스》 455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455?file=Detective_Comics_455.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공포만화 세대의 작가들과 편집자들이 만든 배트맨

지금까지 뱀파이어, 늑대인간, 리퍼에서 유령까지 대표적인 호러물 주인공들을 소개했지만, 이 밖에도 1970년대 《배트맨》과 《디텍티브 코믹스》의 표지들은 그야말로 호러 만화의 대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괴기 캐릭터들로 넘쳐났다. 『배트맨 앤솔로지』에 수록된 '귀신들린 하늘을 나는 죽음의 비행기'처럼 유령 비행기가 나온 경우도 있었고, 렌 윈의 걸작으로 알려진 《스웜프 씽》 시리즈와 크로스오버한 적도 있었으며, 유령 신부, 해적의 망령, 공포의 도깨비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배트맨에 등장했다. 배트맨 만화가 초자연적 공포물과 잘 어울릴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당시 배트맨 만화를 이끈 작가들이 1950년대 호러 만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EC코믹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는 점과, 그들 가운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전설적인 편집자 줄리어스 슈왈츠가 공포물에 정통한 인물이었다는 점 등이 주요했다.

슈퍼맨 시리즈의 전설적인 편집자인 모트 와이징어와 함께 미국 SF팬덤을 형성해 온 인물로도 알려진 줄리어스 슈왈츠는 『싸이코』의 원작자 로버트 블록은 물론 공포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H.P 러브크래프트를 대표하는 작가 에이전시의 경영자이기도 했다.(줄리어스 슈왈츠와 미국 만화 팬덤 형성과 관련된 내용은 황금가지의 『이웃집 슈퍼히어로』 부록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기 바란다.)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