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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더 무관심한 사회를 원한다 | 맘충, 노키즈존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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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의 체류는 본래 살던 공간에서의 보편이 모든 공간에서의 보편은 아님을 알아차리게 하고 나아가 내가 보편이라고 여겨왔던 것의 당위를 되물을 여지를 제공한다. 영국을 여행하며 알아챈 신기한 점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아이들에 대해 굉장히 무관심하다는 점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외출한 가족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거나 힐끗 쳐다보며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다시 자기 하던 일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거나 아기가 울어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소음이었으니 안 들려서는 아닐 테고, 내가 느끼기에는 "어쩔 수 없지"에 가까운 태도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시끄럽지만 참아야지 뭐. 부모를 째려보거나 뭐라 하는 식의 책망이나 비난은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는 처음부터 당연한 상식이 아니다. 나의 소리가 타인에게는 원치 않는 소음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의 사회화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체화될 수 있는 것이고,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공공장소건 아니건 울거나 떠들거나 뛰어다니기 마련이다. 그 아이들을 이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 인정한다면 그들의 소음은 어느 정도 피치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도 아이들을 조용히 하게 하려고 노력하겠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인데 (아니 아무리 자식이어도 어쨌거나 나와 다른 한 명의 인간인데 부모라고 해서 어떻게 자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겠는가?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만큼 아이에 대한 부모의 통제는 절대적일 수 없고 절대적이어선 안되며, 바람직한 양육은 이 지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귀책을 부모에게 지우는 것은 이상하다. 그리고 그 비난의 화살은 아빠가 아닌 엄마에게만 지우는 것은 더 이상하다. 그것도 "맘충"이라는 기이한 이름표를 붙인 채.

"맘충"을 향한 비난은 그 상황을 부당한 것, 부정의한 것으로 인식하기에 나온다. 엄마가 애 관리를 잘 해야 했는데(당위) 하지 않았으니까 욕먹어야 하고, 못할 거면 애초에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당위) 뻔뻔하게 데리고 나왔으니 욕먹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1) 그 "애 관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이가 관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그것이 제대로 된 자녀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와 시끄럽게 할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 사회예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부모는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소음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공공장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2) 아이 "관리"의 짐은 왜 여성에게만 주어지는가? 양육이 부와 모 모두의 몫이라면 아이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것은 부와 모 모두의 책임인데 어째서 양육에 있어서 아버지는 늘 투명인간이 되는가?

3) 공공장소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조차 자식이 있으면 허용이 안 되는가? 자식과 분절된 개인으로서의 삶은 자식이 있는 한 영위할 수 없는 것인가? 이 사회의 엄마들은 이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가?

결국 "맘충"이라는 멸칭의 탄생은 양육과 가사노동을 여성의 몫으로만 보는 가부장제와 뿌리 깊은 여성혐오에 기인한다. 비난과 책망은 유독 여성에게만 무겁게 가해지고, 양육의 짐은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정수기 생수통 가는 짐과 맞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맞바꾸고 싶은 짐이다.

내가 관찰한 것이 영국 사회의 보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에 국한된 일이고, 이것도 다른 여타 조건들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는 아이와 그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인종이 백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라틴계였다면? 무슬림이었다면? 질문의 목록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다. 저들이 처음부터 저랬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인 똘레랑스의 자연스러움은 아마도 시끄러움을 "애써" 참으려는 오랜 의식적인 노력을 전제하고 있을 테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 그들의 거리두기와 수용의 자세는 오랜 의식적인 노력으로 갖춰진 것이리라는 점이다.

〈아이는 울 수도 있고, 떠들 수도 있고, 뛰어다닐 수도 있다. 부모가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고, 신경 써도 아이가 말을 안 들을 수도 있다. 시끄럽고 짜증 나지만 어쩌겠어.〉 이 일련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당장 나만 해도 비행기에서 시끄럽게 우는 아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대체 애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저렇게 울게 내버려 두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는 너무나 쉽다. 언제나 그렇듯 단죄는 쉽고 이해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이해를 향해 노력하는 개인들이 많아질 때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우리 사회의 보편이 될 수 있다. 노키즈존과 맘충이라는 단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지는 이 사회의 보편이 나는 싫다.

나는 좀 더 무관심한 사회를 원한다. 맘충이라는 멸시의 시선이 아닌 존중과 배려의 얼굴로 다가오는 무관심의 사회를 원한다.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관계 맺기가 가능한 사회를 원한다. 그런 전제가 보편화된다면 아이가 없을 땐 가임기 여성으로 라벨되어 국가 인구 재생산의 도구가 되라는 압력을 받지 않고 아이를 낳고 나면 눈치를 보며 아이를 다그치고 혼내며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뒤에서 한 여자아이가 칭얼거리고 있다. 아이는 아빠로 추정되는 사람이 돌보고 있다. 그 누구도 아이나 아이 아빠를 쳐다보거나 조용히 시키라고 타박하지 않는다. 아이의 칭얼거림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른 엄마가 보인다. 내가 사는 곳도 이런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