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김경 Headshot

'프라다를 입은 악마' 등에 비수 꽂는 법

게시됨: 업데이트됨:

일단 소설로든 영화로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내게는 영 별로였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제목은 좋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어 그래? 재밌네. 그런데 왜 하필 프라다인데? 그건 모른다. 우리의 여주인공께서는 악마가 쉴 새 없이 시키는 잔심부름 하느라 그건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으니까. 목표는 어차피 미적지근한 로맨스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다, 뭐 이런 식의 작품이었다.

난 '자본주의의 꽃꽂이'라 할 수 있는 패션 잡지에서 무려 17년을 일했고, 2003년부터 <한겨레21>에 컬럼을 쓰며 자본주의적 욕망과 정직한 자기 성찰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글을 연재하며 독립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그러므로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회사를 그만 둔 그 애송이를 대신해서 '프라다를 입은 악마'들의 핵심을 짚어줄 수 있다, 고 자신한다.

먼저 그들은 정말 악마인가 하는 문제. 유명 패션잡지 편집장들 말이다. 미안하지만 악마라고 하기엔 너무 가련한 그들이다. 연봉 25억이 넘는 안나 윈투어라면 모르겠다. 패션 잡지 역사상 그만한 권력을 쥔 편집장이 없었으니. 하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이었던 그녀도 영화에서 보면 어딘지 애잔한 구석이 있었다. 한국 같은 경우 기껏 해봐야 한 두명을 제외하고 많이 받아봐야 연봉 1억원 안팎일 텐데 그들도 우리처럼 언제든 해고 당할 수 있는 처지라는 점에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악마는 누구인가? 마이클 무어의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 의하면 점점 더 탐욕스러워진 나머지 괴물이 된 자본주의가 바로 전 세계 악의 근원이다. 영화 속에서 마이클 무어가 딕 프레스턴 신부에게 묻는다. "자본주의가 악인가요?" 그러자 신부가 답한다. "그렇습니다. 현재 저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에게 자본주의는 악입니다. 그것은 모든 선에 반합니다. 공익에도 반하고요. 동정심에도 반하죠. 모든 주요 종교의 교리에 반합니다. 자본주의는 정확히 경전들이 말하는, 특히 성경이 말하는, 불의에 해당합니다." 그러자 몸에 비해 정신이 매우 날렵한 마이클 무어가 이번에는 자본주의를 악마로 보는 또 다른 신부 피터 도허티에게 달려가 묻는다. "그렇다면 이 체제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을까요?" 신부가 답한다. "이 체제엔 선전이란 게 내재돼 있습니다. 선전은 무서운 거예요. 바로 이 체제의 피해자가 될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고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능력이거든요."

며칠 전 일이다. 피터 도허티 신부님의 지적이 얼마나 놀랍도록 예리한 것이었지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그 피해자는 연예인, 상위 1%의 부자들, 모델, 번쩍거리는 온갖 값비싼 물건들을 앞세워 자본주의를 찬양하던 매체의 팀장급 인물이었다. 예컨대 '프라다를 입은 악마'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선배 얘기다. 요는 상사가 자신을 쫒아내려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있는데 법적으로 싸울까, 눈물로 버틸까, 아니면 조용히 물러날까 고민이라며 '자유의 몸'이 된 내 조언이 간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애처로웠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매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엄청난 자부심 속에서 무려 10년 가까이 충성스럽게 일했던 그녀다. 한때는 후배들 사이에서 악명도 높았고. 하지만 그걸 몰랐던 거다. 어떤 패션 잡지든 젊음과 신선한 활기로 무장하고 싶어한다는 거. 그 때문에 나이 든 고참 에디터들(무능력하다고 판단되면 편집장까지도)은 사실상 제거 대상이다. 게다가 고참을 자르면 신참으로 적어도 둘 이상 쓸 수 있을 만큼의 고용 비용이 세이브 된다. 그러니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걸로 꼬투리를 잡는다 판단하겠지만 그게 지금 돌아가고 있는 '악마' 같은 자본주의의 현주소다.

자, 당신이라면 뭐라고 조언하겠나? 애가 둘이나 딸린 외벌이 가장 엄마에게. 난 이렇게 대답했다.
"제 경우 조용히 물러나는 건 눈곱만큼도 원하지 않았어요. 제가 먼저 날 욕보인 상급자 등에 비수를 꽂고 한 바탕 전면전을 치렀죠. 결국 심리전이 수반된 난투극 끝에 제 스스로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회사를 나올 때 전 되려 카타르시스를 느꼈답니다. 내 상대는 결코 '악마'가 아니었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악마의 가장 아름다운 나팔수 중 하나에게 칼을 꽂은 기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선배랑 저랑은 처지도 스타일도 달라서 뭐라고 충고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말씀 드리고 싶은 건, 회사는 회사 기밀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상급자 편이고, 후배들은 칼자루를 쥔 권력자 편이라는 점. 그러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그만두든 싸우든 하시라는 것. 특히 싸우기로 했을 땐 모든 패션 잡지가 날 철저히 외면해도 살 방편이 있다는 자신감이 드실 때 하시라는 것. 예컨대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랄까? 뭐, 그 정도입니다."

회사는 내 편이 아니다. 당신의 상급자 편이다. 그리고 당신의 상급자는 당신 때문에 눈곱만큼이라도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당신을 제거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밀 수 있다. 그럴 때 아마 당신은 조용히 제거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보다 먼저 적의 등에 비수를 꽂고 제 발로 걸어나오고 싶을 거다. <원티드>의 제임스 맥어보이처럼 "넌 악마야, 이 추악한 뚱보야. 가서 엿이나 먹으라고." 퍼부어주고 당당하게 걸어나오고 싶을 거다. 그런가? 그렇다면 일단 돈을 아껴 써라. 제임스 맥어보이처럼 물려 받을 만한 현금 유산이 없을테니. 그리고 김무성 같은 얼빠진 정치인이 아무리 흰소리를 해도 출산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당신이 몸 담은 조직에 함몰되면 안 된다. 상사의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건 금물이다. 그럴수록 당신을 더 얕잡아 볼 테니까. 대신 부단히 책(특히 철학이나 문학, 인문서)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며 이 세계의 본질과 보다 개선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당신만의 가치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마지막으로 악마는 왜 하필 프라다를 입는가, 하는 문제. 간단하다. 패션계 먹이 사슬 맨 윗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브랜드(샤넬, 프라다, 루이뷔통 등) 중에서 프라다가 제일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는 게 없는 상사(보스, 대통령 같은 리더까지)들일수록 자기가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못난 상사일수록 자아도취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무식은 자신감에 날개를 달아준다." 했던 다윈의 말 그대로다. 그 때문에 그저 '악마'의 허울 좋은 나팔수에 불과한 주제에 자기가 뭐 대단한 지성인이라도 되는 줄 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아 성찰이라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아니, 잘난 내가 왜? 그런 건 무능력한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하며. 그런 점에서 지성미는 그들의 최대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데 프라다를 입으면 그 약점이 감춰질 거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진실을 제기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묻는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유하고 있다면 악마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오늘도 프라다를 입고 출근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사실에 자족하며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