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경 Headshot

낭만적 밥벌이와 진짜 '예술'

게시됨: 업데이트됨:
1
Gettyimage/이매진스
인쇄

한때 '밥벌이의 지겨움'과 함께 '낭만적 밥벌이'란 말도 유행했다. 지겨운 일이지만 '도리'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밥벌이'라고, 기성세대는 말하고 청년세대는 '세상에는 낭만적 밥벌이도 있다'고 대답했다. 같은 제목의 책도 나왔다.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받은 김훈이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낸 건 2003년이었고,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조한웅이 '어느 소심한 카피라이터의 홍대 카페 창업기'라는 부제를 단 책 <낭만적 밥벌이>를 낸 건 2008년이었다.

누군들 '밥벌이'가 지겹지 않을까? 그래도 '대책이 없다'고 하니 목이 멘다. 때로는 눈물도 난다. 상사든 클라이언트든 남의 눈치 안 보고 느긋하게 자기만의 사업장에서 우아하게 음악이나 틀고 커피나 내리면서 '밥'을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청년 구직자와 퇴직자의 창업 로망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홍대나 신사동 가로수길처럼 청년 상인들이 '낭만적인 밥벌이'를 꿈꾸며 주로 모여드는 동네일수록 임대료가 거의 '악마'적인 수준이다. '낭만'은커녕 본전도 못 찾고 임대한 가게에서 쫓겨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는 게 현실. 듣자 하니 <낭만적 밥벌이>의 저자조차 나날이 높아지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카페 문을 닫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는 쓸쓸한 소식이다.

그렇다고 너무 낙담하지는 말자. 내가 아는 이들 중에는 탄광 도시에 헌책방을 낸 사람들도 있으니까. <빅스톤 갭의 작은 책방>이라는 책을 낸 웬디와 그녀의 남편 잭. 언젠가 작은 책방을 내는 것이 꿈이었던 애서가 부부다. 책에 미쳐 꿈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후예'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까?

요즘처럼 책이 안 팔리는 때가 없거늘, 대도시도 아니고 심지어 인구 5000명이 될까 말까 한 산골 마을에서 중고 책방이라니..., 그 발상 자체가 거의 '돈키호테식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나이도 적지 않다. 여자는 50대, 남자는 60대쯤 되어 보인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닳고 닳았을 나이. 그런데 이렇게 순진할 수가? 아니 순진할 만큼 대담하게 용기 있을 수가? 설상가상으로 돈도 별로 없고 책도 많지 않다. 그런데 해낸다. 기상천외하게 멋진 착상으로 이웃들의 중고 책을 모으고, 없을 것 같은 책벌레 고객까지 찾아낸다. 글쓰기 모임, 댄스파티, 뜨개질 모임, 소규모 콘서트가 열리는 산골 마을 책방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책방과 책방 주인장은 그렇게 무료한 폐광촌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어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보석' 같은 존재가 된다.

그 책을 읽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낭만'이구나 싶었다. 내가 아는 낭만은 '최백호 풍'도 아니고, '미사리 라이브 카페 풍'도 아니다. 선창가 다방이나 라이브 카페 같은 곳에서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이나 '첫사랑'을 회상하는 거, 그런 게 진정 '낭만'은 아닐 테니까.

진짜 낭만주의자들은 '돈'이 누군가의 '꿈'을 집어삼키는 당대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순응해서도 안 되고 체념해서도 안 된다. 웬디와 잭이 그랬듯이 누구나 우리의 삶을 소설이나 시, 에세이로 만들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내면의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예술가적 재능을 일깨워 각자가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전체로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프레더릭 바이저의 명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예술을 책과 연주회장, 박물관으로 한정시키고 세계를 매우 추한 곳으로 만들어버린 예술과 삶 사이의 장벽을 깨부수는 것. 우리의 삶이 파편화된 근대세계에서 잃어버린 의미와 신비, 마법을 되찾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를 낭만화하는 방법이고 진짜 예술이라는 얘기다. 남이 그린 화투 그림으로 대중을 속여 돈을 버는 게 예술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 했던 요지프 보이스의 선언에 따라 나 자신이 예술의 주체가 되어 내 삶과 주변 세계를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만들면 그게 바로 '예술'이고 '낭만'이라는 얘기다.

다행이다. 최악의 경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밥벌이로서 세계를 낭만화하려는 무리들이 속속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상암동에 술 팔고 음악 팔고 북 콘서트도 여는 동네 책방 '북 바이 북'이 생기더니, 괴산 칠성면 외사리의 미루마을 숲속에도 하룻밤 묵으며 북 스테이(Book Say)할 수 있는 책방이 생겼다는 소식이다. 요즘 '낭만적 밥벌이'라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게스트하우스 창업에 대한 책이 먼저 뜨는데, 그만큼 자신의 삶과 세계를 낭만화하겠다고 작정한 듯 보이는 멋진 게스트하우스들이 엄청 많아졌다. 자신의 작은 단칸방을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그곳을 찾아온 흥미롭고 특별한 외국인 게스트들과의 이야기를 책 (<이토록 쉽고 멋진 세계여행>)으로 엮은 젊은이도 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저자도 갤러리 겸 LP 음악감상실에 책방 역할까지 겸한 산중 게스트하우스(예술가의 시골집 & 운교산방)를 운영 중이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살펴보실 것.

* 이 글은 경향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