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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본과 탐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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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MAGNIF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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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서점 업계의 존경받는 스승이자, 80세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유서 깊은 고서점가 '진보초'를 이끄는 전설의 책방지기 시바타 신은 일본을 대표할 만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도쿄 이치가야의 자위대 주둔지를 점거했다는 뉴스를 본 순간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을 끌어모아서 '고댠사' 출판사로 달려갔다고 한다(『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남해의봄날, 2016).

부연 설명을 하자면 『금각사』의 저자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 자살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서점을 운영하는 시바타 신이 미시마 유키오의 저작물을 출간하는 고댠사에 현금을 들고 달려 갔다는 이야기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하면 그의 책이 불티나듯이 잘 팔릴 터이니 미리 현금을 주고 그의 책을 확보하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 구절을 읽고 처음에는 책을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너무 냉혹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미시마 유키오는 지나치게 우파적인 언행으로 '기인'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금각사』의 저자이며 전후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책을 파는 것도 역시 장사이며 서점 주인도 장사꾼이라는 생각과 함께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란 말이 아주 오랜만에 떠올랐다.

타인의 소중한 추억 따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헌책과 절판본을 꽤 오랫동안 수집해온 나만 봐도 시바타 신을 냉혹하다고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내 서재에 쌓여 있는 많은 절판본이나 희귀본은 다른 수집가나 장서가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한다는 이유로 경매로 나온 매물을 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희귀본을 구하면서 그런 연민을 느낀 적이 없다.

당장 용돈 몇 푼이 궁해서 내놓은 가난한 대학생의 희귀본을 거리낌 없이 에누리해서 사기도 하고, 탐나는 희귀본을 손에 넣기 위해서 비열한 짓을 마다치 않았다. 한때 유행했던 개인 간 헌책 거래 사이트에서 희귀본을 차지하기 위해 판매자와 다른 구매자 사이에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유명한 희귀본 판매자가 헌책 수집가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희귀본을 판매 리스트에 올렸는데, 그걸 차지하겠다고 조카뻘 되는 학생들과 누가 먼저 구매 희망 댓글을 달았는지를 놓고 이메일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급기야 애먼 판매자와도 댓글로 논쟁을 벌였다. 이건 마치 용돈을 더 달라고 부모에게 떼를 쓰는 초등학생이 따로 없었다. 하도 거칠게 논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매자와도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다. 앞으로 당신과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는데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판매자가 팔겠다고 내놓은 책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 차마 구매하겠다는 댓글을 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꼼수를 생각해냈다. 판매자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메일 계정을 이용해서 책을 사겠다는 메일을 보낸 것이다. 약간만 치사하면 세상이 즐겁다고 하지 않았는가?

판매자에게 금세 답장이 왔다. 그 책을 나에게 팔겠단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나를 기겁하게 했다. 팔긴 팔겠는데 혹시 저번에 본인이랑 댓글로 대판 싸운 '박 선생'이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저번에 나랑 싸운 뒤라 민망해서 다른 이메일 계정으로 연락한 것이 아니냐"라는 정확한 추측까지 덧붙였다. 나는 즉시 답장했다. "그때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다. 난 당신과 처음 거래한다"라고 말이다.

내가 아끼는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희귀본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를 살 때도 나의 지질함과 몰염치는 여전했다. 참고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는 20세기의 막바지인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의 『인생의 친척』을 시작으로 1997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어느 바보의 일생』을 끝으로 완결된 열두 권짜리 일문학 전집이다. 훗날 『제국의 위안부』로 고초를 겪게 될 박유하 교수가 기획 책임을 맡은 이 시리즈는 구성이 알찬 데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표지 디자인 덕분에 절판되자마자 헌책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한 헌책 판매자가 매일같이 20~30권 정도 판매 목록을 올렸는데, 나는 그간의 거래 실적을 빌미로 단골에 대한 기득권을 요구하여 그날 올릴 책 목록을 미리 알아낸 다음 쓸 만한 책들은 싹쓸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 양반의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가 한두 권씩 판매 목록에 올라올 때마다 떨어지는 홍시를 입으로 받아먹듯이 내 수중에 넣었는데 결정적으로 마지막 두 권만은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급해진 나는 나머지 두 권을 판매해달라고 온갖 회유와 읍소를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값을 두 배로 쳐주겠다는 히든카드를 제시했음에도 그는 단호히 나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유를 물으니, 아내가 그 두 권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팔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두 권 중 열 권을 채웠는데 두 권을 마저 손에 넣지 못한다면 헌책 수집가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사명감에 나는 그에게 매일 문자로 연락하는 스토커와 다름없는 행각을 자행했다.

어차피 열 권을 나한테 팔았는데 나머지 두 권은 가지고 있어서 뭐할 거냐는 투정으로 시작해서,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제발 팔아달라는 호소를 거쳐서, 아내 몰래 팔아넘기라는 회유에 이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끝에 간신히 구한 열한 번째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며, 끝내 손에 넣지 못한 통한의 물건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어느 바보의 일생』이다. 수집 목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소중한 추억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탐욕의 끝을 보여준 사람이 나였다.

허, 이거 참

어디 그뿐인가? 한번은 인터넷 도서 커뮤니티에서 책만 좋아하는 한 바보가 "꼭 구하고 싶은 책"이라면서 『워터멜론 슈가에서』(어진소리, 1995)를 극찬했다. 이 책이 훗날(2007년) 비채 출판사에서 재출간되기 전의 일이다. 나는 어떤 책인지도 몰랐지만, 그의 극찬과 희귀본이라는 이유로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찾아 나섰다. 얼마 뒤에 그 책을 한 헌책방에서 발견했는데 이책의 희귀함을 알려준 그 책만 읽는 바보에게 알리지 않고 내가 냉큼 사버렸다. '바보 같은 녀석 같으니, 라이벌을 스스로 만들다니'라는 비웃음과 함께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희귀본의 전쟁터에서 늘 승리자였던 것은 아니다. 윌리엄 A. 유잉의 『몸』(까치, 1996)이라는 책을 애타게 구하고 있던 시절, 한 수집가가 옥타비오 파스의 『태양의 돌』(청하, 1986)이라는 책을 구해주기만 하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몸』을 나에게 팔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인터넷 헌책방을 다 뒤져서 마침내 『태양의 돌』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나도 보상을 요구했다. 당연한 권리 아닌가. 내가 알려준 소스를 받아 주문을 완료한 그는 보상을 요구한 나의 점잖은 덧글에 "허, 이거 참"이라는 짧은 댓글만을 남기고 그 도서 커뮤니티에 아주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독서만담』(북바이북)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