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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의 시기, 개헌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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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憲法)은 헌 법, 세법(稅法)은 새 법'이란 말이 있다. 우스개 파자(破字) 놀이 속에 헌정의 핵심 원리가 담겨 있다. 한 나라의 근본법은 마치 재산, 수입, 물가에 따라 세율을 조정하듯 수시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국정의 근본 원리를 담은 문언은 손대지 않고 해석과 운용을 통해 그 정신을 살려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헌법재판의 원리이기도 하다.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제헌절 노래의 결구(結句)도 바로 이 뜻이다. 그러나 탄력적 해석을 통해서도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없는 헌법 조항이 있다면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 권력구조에 관한 조항이 대체로 그렇다.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아니면 이원집정제냐, 또는 대통령의 임기를 몇 년으로 하며 중임을 허용할 것인가 등등. 이런 내용은 헌법 문언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1948년 신생국의 출범을 선언하는 문서로 제정된 이래 대한민국 헌법은 아홉 차례 성형수술을 겪었다. 한 시인은 격동의 우리 헌정사를 변태성욕자에게 아홉 차례나 능욕당한 여인의 일생에 비유했다. 매번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 변경이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권리를 규정한 기본권 조항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매번 권력자의 야심과 편의가 작동했고 국민의 복리는 뒷전이었다. 그나마 1960년 4·19 학생봉기와 1987년 6월 시민항쟁, 두 차례 국민이 개헌의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다. 이른바 '1987년 체제'를 마련한 현행 헌법이 거의 30년을 버텨 온 이유도 나름대로 민주적 정당성과 현실적 효용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20대 국회의 개원과 동시에 다시 개헌 논의가 무성하다. 국회의장이 불을 지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전임자들도 그랬다. 임기 2년의 국회의장은 국가 의전 서열 2위라는 자리에 비해 대중적 관심에서 한참 비켜서 있다. 그래서 국민적 관심을 모을 필요도 있다. 국회의장뿐만 아니다. 정치권 곳곳에 개헌론자들이 즐비하다. 개헌안 제출권은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전속 권한이다. 국민은 마지막 단계에 투표로 인준할 권한을 가질 뿐이다.

개헌, 필요한 시점에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진지한 논의 끝에 수순을 밟아 정석대로 진행해야 한다. 우선 '왜 헌법을 바꿔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해야 한다. 헌법은 기본권과 권력구조, 양대 축으로 구성된다. 둘은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 전자가 주(主), 후자가 종(從)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본권이 목적이고 권력구조가 수단이다. 그러니 모든 개헌 논의의 시발점은 현재의 권력구조로는 국민의 기본권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공유다. 그렇다면 현재의 5년 단임제 대통령제로는 국민의 일상적 행복을 증진하기 어려운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진지한 논의와 설득력 있는 대안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무수한 개헌론자 정치인들은 제각기 기대와 속셈이 다르다. 지향하는 방향도 각양각색이다. 의미 있는 개헌 작업을 위해서는 각계각층 국민의 개헌 열망을 응집해내야만 한다. 언론도 시민사회도 학계도 함께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지역 격차, 빈부 격차, 세대 갈등, 비정규직, 사회 분열, 남북의 평화공존 등등 모든 문제를 어떻게 개헌을 통해 개선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한 가지 다짐해야 할 일이 있다. 이 문제에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현직 대통령은 개헌 논의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초연한 자세로 잔여 임기 동안 국정 수행에 전념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강력한 개헌의 장벽은 청와대다. 개헌 논의의 물꼬가 트이면 모든 국정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반대해왔다. 이제는 좀 더 전향적인 자세로 나라와 국민의 장래를 생각하기 바란다. 이미 접고 거두어들인 줄로 알지만 행여나 박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정치적 입지를 도모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면 국민도 자신도 불행해질 것이다. 우리 헌법에는 실로 기이한 조항이 남아 있다. 오래전에 효력을 잃은 사문(死文)이다. 개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날려 버려야 조항이다. 헌법 제90조를 보라. 국가 원로로 구성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고, '직전 대통령'이 자문회의의 의장이 된다고 규정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는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그 이후에 그분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알고 있다. 진정한 민의를 품지 않은 헌법 조항은 헌법이 아니다.

* 이 글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