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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당하지 않는 법'이 아니라 '가해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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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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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 25주년 기념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8) '성폭력을 당하지 않는 법'이 아니라 '가해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글 | 노선이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지난 2015년 2월, 교육부가 학교성교육표준안을 발표했다. 영·유아부터 초중고에 이르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표준안은 금욕을 강조하고, 다양한 성적지향과 가족구성형태, 장애 등에 대한 고려가 없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구성원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표준안을 접한 많은 이들이 큰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성교육의 포인트, 성폭력 '피해'에서 '가해'로

성교육은 자신이 성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게 하고, 자기 몸과 성, 문화를 더 잘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성교육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이후, 사후 대처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성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보다는 "성폭력을 예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성폭력을 예방함에 있어 학교성교육표준안은 주로 '피해를 당하지 않는 방법'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성 교제 시)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평소 우유부단한 태도보다는 단호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2015년 2월 교육부가 발표한 성교육표준안 내용 중

성폭력을 예방하는 방법은 잘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성폭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고 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전에 상대방과 명확한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 상대방의 거절을 즉시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교육에서 금욕? 고조선이야?"

"(건전한 성욕구의 해소방법) 이성과 단둘이 있을 때 성적 충동이 일어나면, 화제를 갑자기 바꿔본다."
- 2015년 2월 교육부가 발표한 성교육표준안 내용 중

교육부가 성교육표준안을 발표한 이후, 교육/시민사회/여성단체들과 성교육전문기관 등이 표준안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재 교육부는 성교육표준안을 수정·보완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지난 8월에 진행된 개정안 공청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여러 개인과 단체들이 문제제기한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만을 나열한 것에 그치고 있다. 아동·청소년의 성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금욕주의, 생물학적 성지식 중심 전달,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 강화, 이성애주의 등)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세부적인 문구만을 수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과 다를 바 없다.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특히 학생간/또래간 사건이라면)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성교육이 제대로 안 돼서 그래"라고 말한다. 성폭력 사건의 예방책과 해결책으로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교육을 잘 해야 한다는 결론이 어렵지 않게 내려진다. 맞는 말이다. 성교육만 제대로 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성폭력 사건은 정말 많다.

하지만 성교육을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으로만 그 내용과 의미를 한정 짓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성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무궁무진하다. '성'을 생물학적인 '몸(혹은 성기)'에 한정 짓지 않고, 일상적인 문화 안에 자리 잡은 '성'을 찾아내거나, 나 자신을 나답게 인정하는 것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교육, 젠더감수성을 높이는 장으로서 성교육은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성교육 시수 확보와 인프라 구축이 필요

현직 교사들은 학교 현장에서 기본 교과가 아닌 성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호소한다. 교육부 지침상 학년당 15시간의 성교육 시수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은 요원하다. 창의적 체험활동시간을 보건교사가 성교육으로 운영하거나 생물, 윤리, 역사, 체육, 가정 등의 관련교과 학습 내용에서 성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면 교과교사가 성교육을 진행한다. 그마저도 관련한 내용이 부족하면 보물찾기하듯 '여/성'이 들어간 내용을 찾아 끼워넣기 바쁘다.

또한 성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보건교사에 대한 지원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학교/학생의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학교에 보건교사는 단 한 명이 배치된다. 보건교사의 주된 역할은 학생들의 건강관리와 응급상황 대처이지만, 정규교과가 아닌 성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별도로 배치하지 않은 상황에서 보건교사에게 그 역할을 추가로 부여하려면 성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성교육이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성교육의 우선 대상은 학생들이 아니다

아동·청소년에게 자신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이해시키고, 획득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의 사용 연령이 점차 낮아지면서, 온라인 문화를 스스로 학습하는 십대들은 이미 성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한 호기심도 한껏 높아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생물학 교과서의 내용을 재활용하고, 사회적으로 수용되어있는 왜곡된 성별고정관념 등이 성교육에서 그대로 묻어나 수업 내용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때문에 성인들이 먼저 성교육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익히는 것이다. 또는 학생교육기관에서 학부모나 양육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좌를 개설하거나 주민센터와 같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적극적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수십 수백 명의 대형 강의보다는 소규모의 토론이나 워크샵 형태의 성교육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기 성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우리의 성문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성교육이 모두를 자유롭게 할 것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적인 존재이고, 아이들도, 학생들도, 성인들도 모두 성을 즐겁게 향유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학교성교육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떤가? 성교육을 국어, 영어, 수학, 과학처럼 기본 교과로 만드는 것, 표준안과 같이 전국에 배포되는 단일한 매뉴얼이 아니라 다양한 교재가 개발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초중고 각 한 학년 또는 한 학기씩을 성교육 기간으로 잡는 것,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에 성교육과 젠더감수성 커리큘럼을 필수적으로 배치하는 것 등 외에도 더 많은 상상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성교육에도 더 많은 상상을 해보아야 한다. 성교육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결국은 우리 모두를 더 자유롭게 할 것이다.

- 본 글은 지난 8월 23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NO 경직! 라운드테이블 - 성교육을 말하다]에 나온 내용들을 정리한 글이다.

- [NO 경직! 라운드테이블 - 성교육을 말하다] 자료집 무료 다운로드

- 성인을 위한 성교육 추천 서적
제인 폰다, 2014, <십대를 위한 교과서 밖의 성 이야기 -돌직구성교육>, 예문사
보스턴여성건강서공동체, 2005, <우리 몸 우리 자신>, 또하나의문화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연재를 마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