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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는 여전히 '강간에 대한 잘못된 신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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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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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 25주년 기념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7) 법정에서는 여전히 '강간에 대한 잘못된 신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글 |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성폭력가해자를 처벌하고 성폭력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누구도 이견이 없는 '일반상식'이다. 성폭력피해자들은 법원이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저울과 칼을 든 법의 여신 디케처럼 어떤 편견도 갖지 않고 공정하고 준엄하게 성폭력 사건을 판결하리라 기대하며 고소를 결심한다. 실제 우리 법원은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성폭력피해자가 법정에 서기까지

우리사회에서 연간 3만 여건의 성폭력 사건이 경찰에 접수되지만 이는 전체 피해의 10% 미만에 불과하다. 오히려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회분위기에서 고소를 결심하는 것만도 아주 특별한 용기가 필요한 현실이다. 검찰은 고소된 사건 중 50.1%(법무연수원, 2016)만 기소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성폭력 관련 통계들을 근거로 추산해보면 결국 100명의 성폭력피해자 중 단 5명만이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릴 기회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최근 유명연예인들의 성폭력 피소사건에서도 보듯이 무고죄나 명예훼손 등 역고소로 인해 피해자에서 피고인의 신분으로 갑자기 뒤바뀌어버리기도 한다. 피해자들이 기대했던 법원의 '정의로운 판결'의 문턱에 가기까지는 험난하고 긴 여정이다.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가? 강력한 '최협의설'의 영향

법정에 선 강간사건의 경우, 형법 제297조의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에 따른다. 여기에서 폭행과 협박의 정도는 대개 '최협의설'을 취하는데, 최협의설이란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협의설은 반드시 반항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성적자기결정권으로 보는 견해와 논리적으로 배치되며, 폭행·협박의 정도를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어 자칫 피해자를 원인제공자로 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최협의설은 강간에 대한 잘못된 신화인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 여성이 저항하는 한 강간은 매우 어렵다. 여성의 거부의사는 진짜 거부가 아닐 수 있다.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남성이 이를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압했을 때에만 강간범죄가 성립한다' 등에 토대를 둔다. 1995년 형법개정 이전까지 성폭력범죄를 다룬 형법 제32장의 제목 자체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아닌 '정조에 관한 죄' 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은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지만 정조에 근거한 판단기준의 뿌리는 잔존해 있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왜 싫다고 소리 지르지 못하였나?", "피고인이 몸을 누르고 있었어도 팔은 자유로워 손만 뻗어도 방문을 열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이 콘돔을 끼우는 사이에 도망칠 수 있었지 않나?" 등의 의심어린 질문을 받는다. 저항할 경우 더한 폭력이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으면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피고인 측의 반격을 받고, 과거의 성력(性歷)까지 낱낱이 들춰진다.

또한 당시 상황의 특수성이나 관계의 다양한 맥락은 배제된다. 심지어 10년 이상 지속된 아버지에 의한 성폭력 피해의 경우에도 왜 반항하거나 곧바로 고소하지 못했는지를 추궁 받는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그 행위가 성폭력임을 인지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만약 사실이 밝혀지면 온 가족이 겪게 될 충격과 혼란을 우려하는 피해자의 깊은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소위 '정상적인' 반응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폭력 판단기준의 편향성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의 경우도 법원의 성편향적인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피고인은 10대의 피해자에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악의적으로 접근하였고, 피해자가 임신한 상황에서 위협과 통제로 지속적인 성폭력을 가했다. 이 사건의 1심과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처음으로 가해자를 만난 경위와 피해자의 당시 판단 능력, 피해자가 미성년자로서 제대로 저항하거나 주변에 요청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심리적 상황,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 등을 고려하여 각각 징역 12년, 징역 9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의 진술보다 '사랑이었다'는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환송의 결정적 이유는 피해자가 당시 교도소에 있던 가해자를 면회 다닌 점과, 접견서신 및 문자메시지의 내용이다. 피해자의 자의가 아니라 가해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피해자 측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파기환송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상고심 중에 있다.
 
판례를 바꾸는(뒤집는) 새로운 물결

다행히 최근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가 아닌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로 보는 일부 판례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성폭력 전담수사관이나 검사·판사들도 인권감수성과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을 받는다.

민간단체에서도 형사사법절차에 대한 비판적인 모니터링 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성폭력수사·재판시민감시단은 12년째 형사사법절차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여성인권존중의 디딤돌·걸림돌을 선정해 널리 알리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법조인들의 성인식을 조사·연구하고, '여성인권을 찾는 시민감시단'을 조직해 형사사법절차의 모니터링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개발해 보급했다. 성폭력피해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대법원 판례가 결과적으로 성폭력을 묵인, 조장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여성주의 판례평석을 통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운동을 지속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운동들이 성편향적이고 성폭력피해의 특수성에 둔감한 사법관행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법의 합리성에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가 반영된다면 성폭력 사건의 고소율 및 기소율, 처벌의 확실성은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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