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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셨더라도 강간은 강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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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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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 25주년 기념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5) 술을 마셨더라도 강간은 강간이다


글 | 잇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장)

취한 상태를 이용한 성폭력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하는 것으로 형법 299조(준강간, 준강제추행)가 적용되는 범죄이다. 2015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에서 술, 약물에 취하거나 수면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성폭력은 약 11.5%(146건)에 이른다. 문제는 이러한 성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함에도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법도 사회통념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강간이 아니라는 생각

호감이 있는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다 상대방이 취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상대방과 성관계를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데이트 상대는 도수가 낮은 달콤한 술을 마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관계를 쉽게 하기 위해 달콤하지만 도수가 높은 술을 몰래 주문해도 될까요?

이는 2015년 12월 24일, 서울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진행한 거리캠페인의 앙케이트 설문이다. 일부 참여자는 위 설문에 당당히 'YES' 라고 응답했다. 취한 상태를 이용하든, 도수를 속인 술을 이용하든, 이들은 '성관계를 하겠다/해도 된다'는 의사를 표현했고, 추가인터뷰를 위해 우리에게 연락처를 남겼다. 그들은 그것을 강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입법취지가 무색하다

2015년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준강간미수 건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에는 성관계를 하려 했는데 나중에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호텔에 들어갈 때 부축을 받았지만 '자기 발로' 걸었다는 점, 경찰신고를 위해 '8층 높이' 계단을 '단 1분 만에' 내려온 점을 근거로 삼았다. 취한 상태에서 가해자 유도대로 걸은 것과, 성폭력 상황에서 신속히 경찰에 알린 신고의지가 성폭력피해를 의심하는 근거가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재판부의 판단은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수단(형법 297조 강간)을 사용하지 않고도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특수성을 고려한, 준강간 범죄 입법취지를 무색케 한다. 필름이 끊겨서도 '취한 채' 성관계에 동의를 할 수 있다면 재판부가 생각하는 동의는 무엇일까? 준강간죄가 처벌하는 가해자는 세상에 얼마나 될까?

성폭력 상황 전후로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었는지 추궁하는 것은, 결국 피해자가 정신을 차리고 계단을 내려올 힘이 있다면 몇 시간 전에 성관계에 동의할 힘도 있었을 것(취해서 기억하지 못하지만, 즉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취했지만)이라는 가상의 성관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것일 뿐이다. 준강간 범죄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취했나' '정말 취했는가' 에 집중하는 것은 이렇듯 사안의 본질을 흐린다.

당연하게도, '가해자가 부축하는 대로 걷거나 가해자의 말에 대답하는 듯이 보인' 피해자의 행동은 준강간 범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성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필름 끊김' 이후 평소와 같은 의사소통의 어려움, 의식불명이나 잠듦 등의 반응은, 피해자가 성관계를 원하지 않았어도 '가해자는 오해할 수 있었다'는 오인 가능성에 힘을 싣는 것이 아니라, 여러 취한 반응들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어떻게 적극적 동의를 구했는지, 가해자가 주장하는 동의가 '술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은' 것으로 인정할 만한지를 판단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여성의 음주가 유죄인 사회

바늘귀처럼 좁은 준강간죄 해석은 많은 성폭력피해를 (피해자는 기억하지 못하고 가해자는 기억하는) 무언의 모호한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탈바꿈한다. 여성이 취하면 강간하고도 성관계로 주장하고, 이 주장이 수사재판과정과 사회에 설득력을 갖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진행한, 3개 중소도시 경찰서·파출소·지구대 등 근무 경찰관 182명 대상 성범죄 관련 의식조사(2012년) 연구결과에 따르면 경찰관 37.4%가 술에 취한 여성이 성폭력을 경험할 경우,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여성의 음주를 곧 성관계 동의로 간주하라는 성폭력통념이고, 강간문화의 반영이다.

'왜 술을 마셨냐'는 공공연한 비난은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여성의 음주에 대한 비난을 공고히 한다. 그 틈에 속임수나 압력을 통한 합의를 성관계 '동의'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을 여성의 의사가 아닌 남성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로 간주하는 가해자의 행동은지지 받는다.

성폭력은 일방적·폭력적으로 행동한 가해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성폭력의 원인과 책임소재를 제대로 묻자. 유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술이 아니다.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연재의 다른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