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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의 강요는 성폭력 해결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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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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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 25주년 기념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1) 피해자다움의 강요는 성폭력 해결을 가로막는다


글 | 잇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장)

성폭력피해의 회복에 정해진 시간은 없다. 그러나 이제 괜찮아질 때가 되었다며, '이 정도의 일'은 어서 그만 털어내기를 바라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이 더 급한 때도 있다.

반면 성폭력피해자의 담담하고 침착한 모습에 주위에서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10대인 성폭력피해자가 아무렇지 않아 보일 정도로 차분히 가족에게 성폭력피해를 알리자, 그 가족들이 더 걱정에 휩싸이거나 성폭력피해 자체를 의심하였던 경우다.

'성폭력피해자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생각이다. 성폭력피해자라면 ○○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러나 성폭력에 대한 축적된 경험이나 깊은 이해에서 온 것이 아니라 '느낌적인 느낌'이 많다. 즉 '왠지 그럴 것 같다'다. 성폭력은 법적처벌을 위해 수사기관에 신고 되는 것만 하루에 53.9건 꼴로 발생하는(경찰범죄통계 중 강간/강제추행, 2014년),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는 일인데도 성폭력과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상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조금씩 다른 사람이듯 성폭력피해자들도 한 가지 대응만을 택하지 않는다. 피해상황에서의 극렬한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위협이나 가해자의 지위 등으로 얼어붙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판단에서 가해자의 요구에 응하기도 한다.

또한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예기치 않게 흐트러뜨린 일상을 되찾고자 각자의 방식대로 노력한다. 공포와 불안 또는 무기력으로 일상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다. 성폭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간이 있을 수도 있지만, 피해자들은 성폭력을 '삶을 모두 압도하지 않는 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나간다.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를 어떤 성폭력들이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고, 한 사람의 삶 안에서도 다르게 위치 지어지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농담에 웃음 짓는 것,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셀카를 올리는 것, 지인들과 잘 어울리는 것, 시험성적이 우수한 것. 이 중 어느 것이라도 '성폭력피해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사소한' 고정관념은 이미 누군가를 평가하는 저울이나 옥죄는 사슬이었을지도 모른다. 성폭력피해자의 일상이 놀랍거나 거부감이 든다면, 그것은 상상 속의 성폭력피해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이거나 자신보다 훨씬 취약하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피해자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고통스럽다'고만 바라보는 사람들, 여성의 강간을 죽음보다 큰 일로 여기고, 씻을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일로 여기는 사회는 성폭력피해자를 평생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잘못됐으며 성폭력피해자에게 해롭다. 성폭력피해자를 씻을 수 없는 고통, 무너진 삶에만 연결 짓는 고정된 생각은 성폭력피해자의 모든 언행을 성폭력피해자답지 않은 것으로, 그러므로 성폭력피해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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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주최 연구포럼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성폭력 통념 비판과 피해 의미의 재구성>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에서 2013년부터 2년간 진행한 <성폭력피해에 대한 인식전환과 피해자다움 극복을 위한 연구>는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피해자다움'으로 명명하고 이것의 형성과정과 영향에 대해서 다뤘다. 그 중 연구논문 <성폭력 피해의 구성과 맥락 - 피해자 자기비하와 사회적 반응의 영향 (김민정, 2015)>에 따르면 '(피해자가) 뭔가 망가진 존재이며, 예전과는 다른 존재인 것처럼' 대한 경우 피해자의 자기혐오, 자기비난, 성폭력 트라우마는 심화되었다.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반한 부정적 피드백은 성폭력피해자의 자기 이미지에 영향을 주며, 피해회복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은 자신이 그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는 데서 출발한다. 성폭력을 소수의 '잘못된 행실의' 사람만이 처하는 상황으로 믿으며 내 일상에서 분리하는 것을 중단하는 데서 공감은 시작될 수 있다. 나라면 어떨지 생각해보고, '성폭력피해자라면 이렇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에만 기대 성폭력피해를 부정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공감은 시작될 수 있다.

성폭력은 성폭력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의 반응과 태도, 해결과정 속에 부딪치며 재경험 된다. 진정으로 성폭력문화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성폭력피해자에게 피해자다울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는, 자기 안에 깊숙이 존재하는 그 선입견과 고정관념부터 깨야 한다. 성폭력피해자에게 요구되는 '피해자다움'은 성폭력피해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연재의 다른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