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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는 어쩌다 '좌우 기득권'만을 대표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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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비교정치학)

지난 2월 17일 정의당은 19대 대선후보로 선출된 심상정 상임대표는 후보수락연설에서 "산업화 30년에도 국가와 기업이 약속했던 풍요로운 미래는 오지 않았고, 민주화 30년에도 노동자·농민·중소자영업자 등 가난한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특히 "모두 함께 잘 사는 노동복지국가를 만들겠다"며, 노동을 정부의 제1과제로 삼는 첫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심상정 후보의 비전은 한마디로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로 요약된다. 아마도 최장집 교수의 저서인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지적된 내용의 반성적 대안인 듯하다. 심상정 후보의 선전을 기원하며,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의 성공조건에 대해 몇 마디 토론해 보고자 한다.

토론의 핵심은 한국의 정당체계와 정당모델이,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어쩌다가 좌우기득권을 과대 대표하는 "과두제민주주의"로 전락했는가에 대한 원인진단과 대안모색이다.

좌우기득권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표체계

첫째, 우리 정당체계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공유이다. 2015년 IMF가 발표한 '성장 과실의 분배: 아시아의 불평등 분석'보고서는 아시아에서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 1위로 한국을 꼽았다. 상위소득 10%가 전체소득의 45%를 소유하고, 나머지 90%의 국민이 55%를 나누고 있음을 꼬집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상위소득 1%와 차상위소득 10%는 소득이 각각 3%포인트, 19%포인트로 증가했으나 하위소득 10%는 거꾸로 3%포인트가 감소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중요한 점은 하위 10%의 소득이 3%포인트가 감소하면서도 상위 10%의 소득 증가폭이 상위소득 1%보다 더 커진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성장의 과실이 상위 1%뿐만 아니라 상위 10%에게도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경제성장의 과실이 상위 10%에 쏠리면서 하위 90%의 소득분배가 상대적으로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IMF보고서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소득불평등이 최악인 원인으로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과 여성노동자의 심각한 임금차별을 지적했다. 이것은 IMF 이후 특혜와 수혜를 받은 상층자본과 상층노동 대비 90%의 하층노동간 소득분배가 균형있게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불균형적 분배의 심각함은 2014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밝힌 광주 기아자동차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임금격차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기아차는 고용형태에 따라 "여섯 개의 계급"이 있음을 보여 준다. 본청 정규직의 임금은 9700만원, 본청 사내하청은 5000만원, 1차 협력사는 4700만원, 1차 협력사 사내하청은 3000만원, 2차 협력사는 2800만원, 2차 협력사 사내하청은 2200만원으로 그 상하격차는 무려 5배가 난다. 이런 차이는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과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한 임금격차는 왜 발생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그 핵심은 그 한국이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달성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그늘로 만들어진 양극화의 상처(인간적 상처)라 할 수 있다. 그 상처 뒤에는 당연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를 분배하지 않고 독점하는 좌우기득권과 이들을 과대대표하는 정치권의 지대추구적인 정당체계가 있다.

'산업화'의 성과가 상위소득 1%에 집중되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를 고착화시켰으며, '민주화'의 성과는 민주화를 주도했던 차상위 소득 10%에 집중되어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간의 양극화를 고착시켰음을 보여준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이 된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은 한마디로, 상위소득 1% 산업화세력과 차상위 소득 10%의 상층노동이 좌우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층노동을 지배·약탈하면서 인간적 상처를 남기는 "과두제민주주의"로의 전락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60년의 결과물인 우리 정당의 대표체계는 조직화된 상층자본(전경련, 재벌)과 상층노동(한국노총, 민주노총)을 과대대표하면서도, 나머지 빈곤층으로 전락한 90%의 비조직화된 중소하청·비정규직을 과소대표하는 '과두제정당체계'라 할 수 있다. 상층자본과 상층노동은 새누리(자유한국), 바른, 국민, 민주, 정의로 어느 정도 대표되고 있으나, 하층노동의 대표성은 거의 없다. 특히, 하층노동과 상층노동을 균형있게 통합할 수 없는 "하층노동의 민주주의가 없는, 상층노동만의 과두제민주주의"라는 점이다.

"하층노동의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은 그동안 진보정당과 진보정치가 추구해온 민주주의와 그 결실이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상위소득 10%에 속한 계층들에게 돌아가게 하거나 주로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들을 과대대표했음을 의미한다. 즉, 진보정치가 대기업 정규직, 공기업 정규직, 전교조, 공무원 등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된 상층노동에 의존하면서 그들의 표를 과대 대표하면서도 반대로 중소하청, 비정규직 등 조직되지 않은 하층노동의 표와 목소리를 과소대표 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우리 정당의 좌우기득권적 대표체계는 우습게도 하층노동의 대표성 없음을 숨기기 위해 민생과 상관없는 이슈에 이른바 진보와 보수로 과잉 포장된 진영논리와 이념을 동원하여 서로 대립·갈등하거나 '국민편가르기'로 국가분열을 초래하면서도 정치적 양극화와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무능함을 보인 것을 정당화한다.

상하층노동을 통합하지 못하는 대중정당모델

둘째, 그렇다면 진보정치가 하층노동을 과소대표 해온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 주장만 있고, 그 대안이 되는 "노동이 있는 경제민주주의"가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상층노동과 하층노동의 이해를 균형있게 통합할 수 없는 "대중정당모델(mass party model)"을 추구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노동이 있는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은 로버트 달 교수가 자신의 마지막 책인 '경제민주주의'에서 밝힌 대로,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 대기업 노조의 임금상승 자제를 전제로 한 임금상승분에 대한 주식제공, 기업초과이윤의 종업원 공동주식 적립, 노사정 대타협에 기초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연대임금제도, 노동자소유경영참가운동 등 민주적 참여기업(기업민주주의) 실현에 올인 하는가 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아마도 정의당이 무의식적으로 상층노동을 과대대표 해온 이유는 대중정당모델을 주창해온 최장집 교수에 대한 지적의존과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했던 민주노동당의 신화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장집교수는 2016년 정의당의 초청워크샵에서 정의당이 "작은 포괄정당"(catchall party 국민정당)으로 변해서, 특정계급의 이익과 이념을 대변하는 대중정당(mass party 계급적 이념정당)에서 멀어져 다른 기성정당과 차별성 없다고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대중정당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최장집교수의 이런 견해는 가장 전투적으로 대중정당모델을 추구했다고 자부해온 정의당 지도부와 활동가들에겐 당혹스런 일이었다. 과연 최 교수의 이런 진단은 옳은 것인가? 아니면 정의당이 옳은 것인가? 둘 중에 한쪽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서로의 반증사례로 볼 때, 최 교수와 정의당 모두 틀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최 교수가 옳다는 가정하에 정의당이 대중정당을 더 순수하게 전투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이탈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에 따라, 더 전투적인 대중정당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대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의당이 대중정당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합법칙적인 현상으로 합리화하는 시각에서 보면 그 반대의 생각도 가능하다. 더 이상 대중정당모델이 집권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그 작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사례로 볼 수 있다.

가장 전투적으로 대중정당을 추구해온 정의당마저 '포괄정당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수권을 포기하고 운동권정당으로 남는 방안을 배제할 때, 수권을 위해 지지층을 넓히고 원내의원들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사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보여 진다. 만약 정의당이 시대적실성이 떨어진 대중정당모델을 추구하여 포괄정당으로 변화했고, 과거의 대중정당모델로 시대역행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최장집교수와 정의당이 설정했던 대중정당모델은 더 이상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 적실성이 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노동있는 경제민주주의 대안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심상정 대선후보가 말하는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가 종전대로 상층노동을 과대대표하여 임금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답습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필요하다. 따라서 그 용어사용도 로버트 달 교수가 초기에 주장했던 "다원적민주주의"차원에서 말한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보다는 다원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말기에 사용했던 "노동이 있는 경제민주주의"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전자가 주로 노동조합의 결성과 정당을 통한 이익표출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노동자의 기업소유와 경영참여를 통한 "기업민주주의"(민주적 참여기업)를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노동있는 경제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그 첫 출발점은 광주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격차를 해소하고 재벌개혁과 노동개혁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한 "상층노동의 임금자제와 자제분의 주식제공", "양보교섭과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연대임금제 실현", "종업원지주제의 민주적 확대", "국민연금의 주주권 강화"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다.

당연히 대안적 정당모델은 조직노동보다는 상층노동과 하층노동을 통합하여 대변하는데 필요한 '국민정당'이나 '네트워크정당모델'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5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밝힌 대로, 상위소득 10%의 임금인상을 자제시킬 경우, 최대 11만 3000명을 새롭게 채용할 수 있고,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할 경우 고용효과가 최대 19만3000명에 이른다는 것을 국가적 이슈로 전면화할 필요가 있다.

* 이 칼럼은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글 | 채진원

2009년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민주노동당의 변화와 정당모델의 적실성"이란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교수로 '시민교육', 'NGO와 정부관계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저서로는 『무엇이 우리정치를 위협하는가-양극화에 맞서는 21세기 중도정치』(인물과 사상사, 2016)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