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국민의제 Headshot

시간을 끌수록 수모를 피할 수 없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PGH
연합뉴스
인쇄

국민의제 시국특집 8회
대통령의 과오로 국정이 마비되는 현실에 직면하여 오늘의 우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되 나라의 미래를 밝히 열고자 <국민의제>가 탐조등을 비추는 기획특집을 마련합니다.

글 | 유초하(충북대학교 명예교수)

대통령의 선무당 아바타 놀음으로 온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 분노를 넘어 허탈하다. 하지만 넋 놓고 마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상시국 기획특집 논단에 몇 마디를 보태고자 한다.

12일 100만 촛불 전날까지 지지율 5%였으니 앞으로는 더 떨어질 것이다. 박근혜여사는 이제 대통령이 아니다. 나라의 종복이 주권 국민의 명령을 어기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태가 더 이상 용인돼서는 안 된다.

집권여당 전 대표 입에서 탄핵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왔다. 박여사의 최근 행태는 대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의 것인가 의심이 간다. 이 지경에 와서도 "대통령으로서 정국을 안정시켜야 할 책무를 수행하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부산의 엘시티 비리 사건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일은 웃기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 날 정도의 코미디라 하겠다. 본인이 책임져야 할 비리와 과오가 몇 백 배는 될 터인데 어찌 정상적으로 국정을 살필 생각을 먹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조차 하다.

인구의 적어도 95퍼센트에 해당하는 시민들에게는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창피하고 부끄럽다.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이라도 편하게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게 순리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도 불쌍한 여인이다. 남들이 보면 성년에 도달한 이후 그에 걸맞은 책임을 다하는 개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유신공주이지만, 그 자신의 편에서 보면 숱한 고난과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대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방황과 시련 속에서 영생의 희망을 띈 한 줄기 빛을 만났고 그 이후 줄곧 그에 매달려 억지 위안과 안식을 얻으며 살아왔으니 기구하고 가혹한 운명의 여인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최상의 지위에 놓인 공인의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

대통령이라는 영예까지 누린 사람답게 더는 나라와 겨레의 품격을 손상하지 말고 무거운 짐을 벗어 몸과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어 현재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옳다. 예로부터 이 땅의 백성들은 딴 세상으로 옮겨간 이나 가진 것을 털어버린 이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용서하는 삶의 기풍이 있었다. 앞으로의 생애 동안 그나마 화평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잘못을 유보 없이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길이다. 뒷모습만은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 될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구차하고 몰골사나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시간을 길게 끌수록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현직 대통령이 형사범으로 수사 받는 수모를 피해갈 수 없을 터이다.

탄핵의 절차를 밟는다는 건 논리상 일견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건 촛불을 들어 우리 사회를 건지고자 광장과 거리에서 목이 쉬도록 외치는 주권자 시민들의 삶을 계속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나라를 위해서나 여야 정치권을 위해서나 실익이 없는 허망한 세월을 늘여가는 일이 된다. 여러 달에 걸쳐 지루한 공방을 벌인 뒤 설사 헌법재판소가 2018년 2월까지의 임기를 살려놓는다고 해서 대통령이었던 인물의 실추된 명예가 되살아날 리는 만무하다. 온갖 의혹을 불문에 부치고 2012년 12월의 선거 결과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에게 지지표를 던졌던 51.6%의 투표권자들 또한 스스로를 책망하고 반성해야 마땅하다. 다시는 비슷한 오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현 시점에서 거국중립내각은 효용성 없는 말장난이다. 야당들이 총리지명권을 행사한다는 것도 썩 어울리는 일 같지는 않다. 김병준 총리지명 사건은 박여사의 국회방문과 '여야 합의에 의한 총리 지명' 제안에 따라 없었던 일이 된 걸로 봐야 한다. 내각구성원을 정당 의석에 따라 배분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과오를 범한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해서 곧바로 정치가 새로워지고 나라가 정상화되기를 기대한다는 것도 온당한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는 일은 이제부터 주권자 시민대중의 공동노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진전시켜 나감으로써만 가능하다. 야권은 복잡한 정파별 손익계산에 따라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총리지명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고, 여당의 정파들도 굳이 자신에게 유리할 만한 인물을 찾기에 골몰할 필요가 없다. 여의도 쪽에 한 마디, 반 구절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총리후보를 발표했던 절차상의 무리를 시정하고 적절한 형식을 갖춘 방식으로 예컨대 김종인, 박찬종, 손학규, 정운찬이나 네티즌들이 추천하고 있는 유시민 정도의 인물을 내세운다면 그 제안자가 누구든 어느 정당이든 그에 대해 여야의 정치권이 합의해 준다고 해서 비난할 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약하자. 주권자 시민대중의 가슴과 머리에 느닷없이 덮어씌워진 깊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세계 백방에 드러낸 국가적 수치를 거두어들여 민족성원들의 긍지와 나라의 품격을 회복할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글 | 유초하

유초하는 1948년에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문학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2년부터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공동의장과 한국사상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작년부터는 파주에 작업장을 마련하여 <한국사상사산책>을 저술 중이며, 마로니에방송에서 대중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그 배경신념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래를 개척하는 힘은 현재의 자신감에 있고, 그 자신감은 역사와 문화에 바탕한 긍지와 자부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