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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시베리아·바이칼 역사인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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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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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진택(마당극 연출가, 판소리 명창)

지난 여름, '희망래일'이라는 사단법인 단체가 주관한 연해주·시베리아·바이칼 역사인문기행에 참가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비행기로 가서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의 삶과 독립운동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이르쿠츠크까지 사흘밤낮의 철도여행을 거쳐, 바이칼 호수 안의 알혼섬을 다녀오는 8박10일의 여정이었다. 내가 이 역사인문기행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보다는 연해주 독립운동사와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알려진 바이칼 호수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실은 안중근 의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는 몇 해 전 안중근 의사 일대기를 판소리로 창작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안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자서전 '안응칠 역사'로부터 최근 안중근평화연구원(이사장 함세웅)이 발간한 방대한 양의 '안중근 자료집'까지 살펴보았으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 의문은 이런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의 파괴자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였다. 그러나 안의사의 당시 활동 근거지는 만주가 아니라 연해주였다. 안의사는 검사 취조나 법정공방에서 끝내 단독범행임을 주장하였으나, 분명 배후에 연해주를 근거로 한 어떤 숨겨진 인물(세력)이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구일까?"

그런데 이번 단 한 번의 연해주 여행으로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연해주의 고려인 후손들은 누구나 다 러시아 한인사회의 제1인물로 최재형 선생(1860~1920)을 꼽고 있었고, 우리 여행단을 안내한 현지의 가이드맨조차 서슴없이 "최재형이 없었다면 안중근도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안중근의 배후에는 러시아에 귀화한 최재형이라는 동포 재력가가 있었으며,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자동권총이 '대동공보' 사장인 그로부터 나왔음을 이곳 사람들은 당연한 사실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모르거나 믿지 않으려 한다. 왜일까? 문자로 남은 것은 신빙하고 말로 전해지는 것은 의심하려는 병폐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침략원흉을 처단하고 붙잡힌 안중근이 일본인 검사나 재판장 앞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조직과 배후를 진술할 리 없지 않은가?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나는 "진실은 문서나 자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승되는 역사 현장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해주 제2의 도시인 우수리스크는 발해의 옛터로 그 어원이 '늪지대'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수리스크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 수이푼강인데, 이 수이푼 강가에 이상설(1870~1917)님의 유허비가 있다. 나는 그동안 이상설을 헤이그 밀사 중 한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연해주 여행에서 그 분의 진면목을 다시 발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설은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찾아간 3인 중 정사(正使)의 위치에 있었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헤이그 회의 참석은 저지되고, 이를 빌미로 통감 이토히로부미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으며, 밀사 3인에 대한 궐석재판이 이루어져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 후 이상설은 해외로 망명·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널리 알리는가 하면, 연해주에 정착하여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권업회(勸業會)를 창설,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무장 항일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고 한다. 특기할 사항은 1914년 이상설이 이동휘·이동녕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항일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접하면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요즘 친일수구세력들이 소위 '건국논쟁'을 유발하여 민주독립세력을 이념적으로 몰아가면서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 되었고, 1919년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배태기(胚胎期)였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이렇게 반론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 3.1독립항쟁 직후 건국되어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두었으며, 1948년 한반도 '가능지역'에 공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4년 연해주에서 이상설·이동휘·이동녕 등이 앞장서 세운 '대한광복군정부'는 1919년의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을 낳은 배태(胚胎)였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나의 이런 생각이 결코 엉뚱한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설은 1917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동휘와 이동녕은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총리와 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그 후 연해주 임시정부와 한성 임시정부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의 과정을 거쳤으니, 앞서의 생각이 전혀 엉뚱한 생각이 아닌 것이 맞다. 나는 이상설님 유허비 앞에서 우리 여행단 일행에게 판소리 단가 '이산 저산'을 처음 강습하는 것으로 그 분께 재(齋)를 지냈다. 유허비를 떠나면서 나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이상설 선생이나 도산 안창호 또는 백범 김구선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희망래일'이 기획한 시베리아 여행의 특징은 '철도'에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무려 73시간을 달린다.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유라시아를 관통하여 멀리는 모스크바와 생페테르부르크까지, 베를린과 빠리를 거쳐 대서양과 지중해까지 닿는 기나긴 여정이다. 잠깐 여담을 하자면, 친구 몇몇에게 이번 여행을 권했더니 개중에는 3박3일간의 기차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다며 사양한 친구가 있었다. 사실 나도 마음속으로는 기차여행이 좀 괴로우려니 걱정도 들었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 그러한 괴로운 시간을 지나 바이칼에 도착하면 더 기쁨이 클 것이라는 위안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사흘밤낮의 기차여행은 너무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우선은 여름 시베리아의 풍광이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4인 1실의 좁은 객실에서 나만의 침대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나를 되돌아보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병실에 누워있거나 감옥에 가지 않고도, 여행 속에서 일상의 시간을 벗어나 이처럼 자기 침잠(沈潛)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선물이었다.

사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그렇게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뼈아픈 역사의 산물이다. 철도 부설 자체가 러시아 제국의 동방 정벌 목적에서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고난의 행로였기 때문이다. 연해주 척박한 땅을 개척하여 삶을 일구던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로 이동 당한다. 강제 이주의 이유에는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세계대전의 징후와 함께 소련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극동에서 일본인과 구별되기 어려운 고려인을 군사전술상 소개(疏開)시키려는 이유였다고 하며, 다른 또 하나는 사회주의 집단농장 정책의 일환으로 소수민족인 고려인들이 일구어낸 자영농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어떻든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척박한 불모지로 유배되어 버렸다. 당시 18만명이 야간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맨몸으로 끌려갔다는데, 그 해 겨울 그 중 1/3이나 되는 동포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고 한다. 더욱이 분개할 노릇은, 고려인들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강제이주 실행 직전에 고려인 지도급 인사 2500명을 약식재판을 거쳐 무자비하게 총살하였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참으로 뼈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또 다른 기막힌 사실은 그렇게 강제이주 당하여 '까레이스키'로 살아가던 고려인들이,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독립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또다시 역차별을 받고 있어, 적지 않은 고려인 후손들이 그 불이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연해주로 귀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이 아직까지도 이토록 질기게 고통으로 남아온다는 것을 우리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더 돌이켜볼 일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가던 여정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우리 민족의 슬픈 현실을 목격하였다. 우리가 타고 가던 열차 맨 뒤에 뜻밖의 객차 한 량이 붙어있었는데, 그 객차의 행선지는 <평양 - 모스크바>로 적혀 있었다. 열차가 쉴 때마다 허름한 런닝셔츠 차림의 사내들이 나와 경계하는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곤 했는데, 알고 보니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파견되어 나온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남쪽 서울에서 온 관광여행 차림의 우리들과 북쪽 평양에서 온 초라한 행색의 집단노동자들의 모습이 비교되면서 분단된 민족의 미묘한 서글픔을 피할 수 없었다.

바이칼 호수는 장엄하였다. 호수의 크기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으며, 호수를 둘러싼 산맥의 지형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장엄 그 자체였다. '희망래일'이 제작한 안내서를 보니, 바이칼 호수는 여러 가지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2500만년이라는 생성의 역사를 갖고 있는 호수요, 수심이 1600여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저수량이 전 세계 담수호 가운데 최대 규모라고 한다. 육지에 서서 바라본 바이칼은 호수라기보다 바다였다.

나는 바이칼에 가기 전에 어떤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오래된 전래설화 '바리공주'에 관한 것이었다. 오구대왕의 버림받은 일곱째 딸인 바리공주가 아비의 병을 낫게 할 약수를 찾아 먼 길을 가는 이 설화에서, 나는 그 약수샘터가 바로 바이칼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무릇 설화란,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전승·기억의 추상적 응집이다. 이를테면 만 년 전 혹은 오천 년 전 바이칼 인근에 살고 있던 우리 민족 조상이 그 곳을 떠나 흘러와 살면서 계속 잊지 않고 전승해온 바이칼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바리공주 설화에서의 약수(藥水-생명의 물)로 승화되어 온 것 아닐까 하는 짐작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나의 예감일 뿐이므로 정설일 수는 없으며, 바리공주가 찾아간 그 생명의 물이 브리야트의 바이칼 호수일지 아니면 몽골의 홉스굴 호수일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각설하고, 바이칼과 한민족의 관련성에 있어서는 이른바 '순록 민족기원설'이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나 '고려'는 순록(사슴)을 뜻하는 '코리(khori)에서 유래한 말로, 바이칼 동쪽에서 순록을 키우면서 살아온 코리족을 비롯한 순록 유목민 일파가 순록의 먹이인 초원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목축과 농업이 결합하여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이들 유목민족이 남하해 농경민족과 어우러져 정착함으로써 한반도 우리민족 국가형성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 '순록 민족기원설'이다. 한국인의 DNA가 바이칼 주변의 브리야트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가장 가깝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바이칼'이 우리 민족 생성의 시원임은 인류학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고 한다.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에서의 2박은 참으로 꿈같은 날이었다. 칭기즈칸이 묻혔다는 전설의 바위 부르한 바위 앞에서 우리는 기차 안에서 틈틈이 연습한 판소리 단가 '이산 저산'을 합창하여 제의를 치렀다. 연해주에서부터 우리민족 근현대사의 수난과 의지를 가슴에 담고, 72시간 시베리아 야생의 숲을 열차로 횡단한 후 바이칼 호수 알혼섬에 몸을 누였을 때, 나는 과거와 미래, 역사와 현재, 유목과 정착, 문명과 야생, 자연과 인간, 민족과 세계, 산맥과 호수, 기억과 망실, 생명과 죽음, 지구와 우주, 일상과 침잠을 동시에 체득한 뿌듯함으로 황홀 속에 빠져 지냈다. 제현들이여, 여름이든 겨울이든 연해주·시베리아·바이칼 역사인문기행을 꼭 한번 체험하시기를 권한다.

글 | 임진택 (林賑澤, Jin-taek Lim)

연극 연출가 - 한국 전통연희에 바탕한 '마당극'(Open Theatre)의 창시자
대표작품 : 마당극 <밥>
판소리 명창 - 옛판소리가 아닌 새로운 창작판소리의 대가
대표작품 :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오월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