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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청년수당에 딴죽 거는 복지부의 치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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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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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면희(성균관대 초빙교수, 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이는 성경의 한 구절로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규례인데, 서유럽이 복지정책을 시행할 때 그 최소한의 규범적 지침을 제시해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청년 복지정책과 관련해서 서울시와 보건복지부가 갈등을 빚고 있다. 서울시는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 있으면서 생활형편이 어려운 청년들 2831명에게 매달 50만원을 지급하는 정책 실행에 착수하였는데, 보건복지부가 현행 법률 위반을 거론하며 시정명령을 내린 데 뒤이어서 취소처분까지 내렸다. 물론 서울시는 이에 반발하여 대법원에 제소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법적인 시비는 사회보장기본법에 명시된 것처럼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 간에 협의를 행했느냐로 모아질 것인데, 서울시는 협의가 동의나 합의와 다르고 이미 6개월에 걸쳐 의논하면서 이해를 구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래저래 양자 간의 충돌은 불가피한데, 이 사안이 일회적 해프닝으로 끝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된 복지정책은 매우 중대한 현안으로 2017년 대선 국면에서도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입장에 깃들어 있는 복지정책의 철학을 살핌으로써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느 입장이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요청되는 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서유럽의 경우 이념적 보수는 전통을 중시하는 가운데 자유의 가치를 핵심으로 천명하면서 복지정책에도 임하고 있다. 일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직업에 접근토록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파이를 키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자유시장의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최선의 복지는 시장 자유주의에 따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여 일에 따른 혜택을 누리게 하는 데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보수는 정책적으로 노동 능력을 결여하여 빈곤으로 내몰린 경우에만 이를 선별하여 복지적 시혜를 주자는 선별적 복지를 견지하는 편이다.

반면 이념적 진보는 시장 자유주의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판단 속에 평등의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며, 이런 맥락에서 모든 국민은 보편적으로 복지 혜택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이면 누구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 배려하자는 입장이다. 물론 필요한 재원은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충당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좌우의 정책적 대비 속에 복지정책을 펼쳐온 서유럽의 경우와 비교할 때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14년을 기준으로 할 때 우리나라의 GDP 대비 복지지출 비율은 OECD 조사 대상국가 28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수위를 차지한 프랑스와 핀란드가 각각 31.9와 31%이고, OECD 평균이 21.6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10.4%에 불과했다. 이런 열악한 현실에 비추어보면 복지에 따른 비용을 계속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 있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빠르게 성취하여 OECD에 가입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국민소득도 2만 달러 고지에 이름으로써 마침내 복지정책을 가동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21세기의 우리는 선진국 초입에 들어섰지만 과거의 활력을 잃어버린 채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다. 재벌과 소득 상위 10%로 수렴되는 경제력 집중으로 인해 사회 양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고, 노동진영마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청년실업은 가중 상태에 놓여 있다. 지금은 연간 두 자리 수의 경제성장이 아득한 옛말이 되면서 3~4% 달성도 허덕거릴 지경이 되었다. 이런 침체시기에 서유럽이 상승 가도의 성장 국면에서 구사했던 보편적 복지정책을 그대로 외치는 것은 듣기에 좋을 뿐이지 현실화가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보수의 선별적 복지정책 단계에 주저앉아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이때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대목은 성경이 들려주는 바와 같이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다. 그 기본 정신은 우리의 전통사상이었던 유불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보수정치는 기본적으로 몰인정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집단은 돈과 권력 자체에 대한 탐닉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별해서 복지정책을 시늉 내는 정도로 그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이는 사회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무책임이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하겠다는 청년 복지정책은 아직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 놓인 가난한 청년들에게 삶의 희망과 기회를 열어주는 시도를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복지부가 복지정책을 관장하고 주도해야 할 바의 정부 부서일진데, 서울시의 정책에 딴죽을 건다면 이것은 못난 자의 옹졸함이요 무책임의 극치일 뿐이다.

사실 복지정책에 있어서도 제3의 길, 즉 공동선 복지정책이 가능함을 언급하고 싶다. 21세기 신공동체주의는 인간을 연계적 자아의 존재로 간주하는데,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아의 고유성을 자유롭게 실현토록 하되 그것이 연계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들과 더불어 공동의 선을 이루는 데 기여하게 조성하는 것이다. 복지정책의 차원에서는 먼저 시장서 일자리가 원활하게 창출되어 노동능력을 갖춘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다음으로 이윤이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공동체적 일자리를 조성하여 사회적 존재감을 느끼면서 일을 하고 그에 따른 삯을 알맞게 받도록 배려하며, 마지막으로 노동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혜택을 주도록 하는 입장이다.

박근혜 정부의 복지부가 박시장의 정책에 대해 일해야 할 청년들에게 현금을 주는 것은 그릇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하여 이를 제지하는 측면도 있다고 판단된다. 신공동체주의를 주창하는 필자 역시 돈 몇 푼으로 각 개인이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차단하게 된다면, 이것은 아니 주는 것만 못하다고 본다. 돈보다 자아실현의 기회 획득이 더 중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박시장의 정책은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를 찾도록 적극 돕는 일시적인 현금 지원이라는 점이다. 이것마저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지부는 복지정책의 참뜻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고착 상태를 돌파하려고 한다면, 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발상이 과감하게 요구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곳곳에 패권적 권위주의와 부정부패, 갑질 행위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것이 사회의 근본악임을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리를 깨려면, 자율성이 곳곳에 만개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자율성이 피어나는 곳에서는 창의성과 더불어 책임감도 무르익게 된다.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없음은 권위주의 학문 풍토에서 창의성이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요, 세월호 사건이 터진 것은 해피아와 경영진의 갑질과 부패로 인해 선장을 필두로 한 선원들 일반의 무책임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시행하겠다는 건전한 정책을 복지부가 막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정부 부서는 특정 정치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정책을 펼치도록 해야 하고, 이에 부응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위에 대해서는 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 | 한면희

현재 성균관대 초빙교수와 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과거 생태철학자로서 대안적인 녹색대학의 대표(교수)와 한국환경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초록문명론>과 <미래세대와 생태윤리> 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환경정의연구소 소장으로 아토피 자녀의 어머니들과 교류하면서 갖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생태의학의 지평을 여는 데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치철학자로서 <제3정치 콘서트>를 출간하는 등 공동선과 사랑의 정치를 본원적으로 실현하는 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