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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랑 처음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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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 갓 예비군 1년차가 된 봄이었다. 전 해 여름에 전역을 했으니 복학생 생활을 한 학기 겪고 3학년이 되는 파릇파릇한 대학생이었다. 군복무 시절 상병이 반쯤 지난 이후로는 연애에 대한 갈증으로 히스테리 부린다고 중대에서 유명할 정도였으니, 전역하자마자 이리저리 연애를 하기 위해 늑대처럼 배회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전역 직후 그렇게 만난 남자와 시작한 연애가 이도 저도 아니게 흐지부지 끝나자 아, 이게 그냥 '나랑 너랑 이제 애인이야 뿌잉뿌잉' 한다고 해서 다 행복한 건 아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100일 남짓한 시간 동안 '연애'라고 이름 지어 만나긴 했지만, 적당한 사람 적당히 좋아해서 연애를 하면 역시 적당히 끝나는 거였다.

그런 미지근한 연애가 한 번 지나가고 난 뒤, 연애를 다시 해야겠다는 의지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냥 잘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인터넷 게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형의 프로필을 봤을 때도 뭐, 인물이 나쁘지 않으니 쪽지나 보내볼까 하고 말을 걸었었다.

형도 사실 같은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때 형도 이래저래 마음 복잡한 일도 많고 몸도 바쁜 시기여서 연애에 대한 갈증도, 연애를 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내가 보여준 사진들 중에 다도 아니고 한 두 장 정도가 오 내 스타일인데, 싶어서 큰 기대 없이 약속 장소로 나왔다고 했다.

아직 찬 기운이 남은 3월이었는데 부슬부슬 비까지 내려 꽤나 쌀쌀했던 것 같다. 건대입구역 바로 앞의 엔젤리너스에서 우산을 들고 회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는 형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가치판단 없이) 우와, 크다! 였다. 나중에 물어봐서 들었던 형의 내 첫인상은, 내가 보여준 사진들 중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내 실체를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자기 스타일이어서 한눈에 반했다는 거였는데, 그래서 내 느낌은 '엄청 크다!' 였어, 라고 말해주기 조금 미안하긴 했었다.

물론 첫인상은 그랬지만, 이건 말 그대로 사람이 진짜 커서 놀랐던 거고, 잠깐 보는 사이에 형이 내가 참 좋아하는 인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사진만 본 후의 첫만남에서 진짜 괜찮은 사람이 나오는 건 (일반들의 소개팅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열에 하나 정도 되려나. 그런데 그 사람이 날 마음에 들어 할 확률도 열에 하나일 테니, 둘의 쿵짝이 잘 맞으려면 100번은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이다. 아마 형을 만난 그때가 내 100번째 차례였나 보다.

어쨌거나 나는 나이 서른 먹은 덩치 큰 남자가 내 앞에서 뭔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귀여웠고, 술 좋아하냐고, 맥주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건대 쪽은 형이 잘 안다고 했기에 데려가는 데로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이름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상할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의) 광장호프였다. 3월이라 여기저기서 근처 대학교 학생들의 과 술자리가 벌어져 있었고, 다들 자기소개하고 게임하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거대한 술집은 마치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봐왔던 독일 옥토페스트 한 장면 같았다. 종업원들이 롤라라도 타고 다닐 것 같아...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방심하고 있는 사이 형은 술 좋아한댔죠? 하면서 안주 세 개에다 삼천을 순식간에 주문했다. 헐... 둘이 온 술집에서 삼천 시킨 경험은 내 생에 그때밖에 없다. 분명 주문 받는 종업원은 사람들이 더 오는 줄 알았을 거야... 안주도 탕에 떡볶이에 화채에 뭐 그런 전형적인 개강파티 안주였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지하철 지하철이라도 했어야 할 분위기였다.

물론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형은 워낙 술도 잘 못 마시고 술자리 자체를 잘 안 즐기는 사람이라, 아는 술집도 없고 어떤 분위기의 술집을 찾아야 하는지 몰랐었던 거였다. 더군다나 그때는 어디가 좋고 뭐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냥 나한테 반해서 정신이 하얘진 상태였다니 광장호프든 중립국이든 아무데라도 일단 찾아 들어간 거라 했다. 횡설수설 하면서 맥주를 들이켜는데, 이 사람이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바보인 척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알겠어서 그냥 웃기고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형에게 호감이 있다고 표현한 방법도 참 웃겼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아마 당장 따귀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어디서 많이 본 인상이다 생각했는데, 떠올랐어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야동에 나오는 배우랑 되게 닮았어요! 형은 음, 뭔가 오묘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네, 하면서 피식 웃었었다. 나중에 실제로 형한테 보여주니 형은 이 뚱땡이랑 자기가 뭐가 닮았냐고 반발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한 명에 다른 한 명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닮은 상들이다.

그날 이른 저녁 시간에 만났던 우리는 그렇게 광장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비집고서 몇 시간이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블라인드 데이트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바이 누나한테 그래서 만난 남자는 어떠냐고 문자가 왔었는데, 아마 그때 했던 답장이 대박! 이었던 것 같다. 이제 슬슬 막차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둘 다 헤어지기 아쉬운 상황에서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라면 먹고 갈래? 는 아니었고 우리 집에 가서 맥주 한 잔 더 할래? 사실 그날 난 외박에 대한 가능성을 아예 닫아두고 있었으므로 심지어 안경도, 렌즈 통도 안 챙겨 나간 상태였다. 외박 할 마음이 있었으면 렌즈통이 뭐야 아예 세면백을 챙겨갔지. 당장 콘택트렌즈는 어떻게 해야 하지, 끼고 자야 하나, 편의점에 렌즈통이 파나, 이런 고민이 들면서도, 입으로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그날이 벌써 7년 하고도 10개월 전이다. 20대를 이렇게 한 사람에게 바치다니 하... 어린 애 꼬셔서 결혼까지 했으니 어른이 책임지고 더 잘하라고 하는 소리는 사실 그냥 형에게 장난처럼 하는 진담이고, 나도 당연히 형이랑 있는 게 좋으니까, 20대 뿐만 아니라 30대도 40대도 늙어 파뿌리가 될 때도 계속 같이 있으려는 거지 뭐.

형이랑 처음 만난 날 생각하니까 그날 그 술집에라도 한 번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든다. 다음 주말에 형이랑 건대나 가볼까나.


(www.snulife.com 에 게시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