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게이 Headshot

티파니에서 반지를 <2>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2015-01-29-aaaaaa.jpg



티파니에서 반지를 <1> 에 이은 글입니다.


2012/12/13 티파니에서 반지를2

아무리 연말이라도 그렇지 어쩌다 보니 이번 주 월화수목금은 죄다 회식이다. 팀회식 동기회식 부문회식 단회식 사원회식 협력사회식 어쩌고 저쩌고 회식 등등 12월 탁상 달력에 회식과 송년회 일정만 가득한데, 아무래도 이번 주가 피크인 것 같다. 이건 뭐 저녁에 일할 시간도 쉴 시간도 나지를 않네.

오늘 저녁에는 팀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원 대리 셋이 함께 모여 팀장 욕이나 하기로 했다. 사실 지난 월화수 삼 일 동안 마신 술이 좀 하드코어했고, 내일 난이도 불지옥으로 예상되는 회식 자리가 있어 오늘 하루쯤은 그냥 일찍 집에 가서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닭강정에 콜라나 한잔 하고 싶은데, 또 살뜰한 대리 형님이 한잔 하자고 하시니 어찌 내일 거래처 회식 대출해주실 거 아니면 조용히 계시죠 라고 말할 수가 있나.

사실 오늘 저녁에는 반지를 사러 가려고 했다. 계획한 프러포즈 데이가 다음주 토요일인데, 사이즈가 없으면 주문 후 찾으러 다시 가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번 주에는 꼭 가려 했었다. 그런데 이건 뭐 매일 저녁 술술술이다 보니 도저히 저녁에 백화점 갈 시간이 나질 않는 거다. 그렇다고 다음주로 미루면 또 시간이 어찌될지도 모르니,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점심시간 앞뒤로 15분 붙이기 신공을 시전하여 회사 근처 백화점에 오늘 당장 다녀오기로 했다.

목요일 점심시간의 S 백화점 본점은 집 잘 살 것처럼 생긴 아주머니들과 근처 직장인 여성들의 텃밭이었다. 심지어 티파니 매장에도 목에 사원증 찰랑거리며 대리 과장 급 여성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와 어머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 난 저게 더 예뻐! 하며 코피를 닦고 있었다. 지난 번에 한 번 반지 구경하러 왔던 경험이 있다 보니 특별히 긴장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빨리 반지를 사서 형에게 주고 싶다는 마음만 들 뿐이었다. 슬그머니 기웃기웃 거리고 있으니 말끔한 여성분이 다가와 중학생이 하우 아 유 제인, 아임 파인 땡큐 읊듯 기계적인 억양으로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어떤 것 찾으시나요?" 라고 물었다. "밴드 링 좀 볼게요."

이미 디자인들을 한 번 훑고 간지라 딱히 눈에 띄는 반지는 없었다. 일단 옐로우는 집어치우고, 플래티넘이나 플래티넘에 옐로우가 섞인 것 중 고를 마음이었다. 난 내심 참깨 사이즈라 해도 다이아가 작게 박혀있었으면 했는데, 참새 눈곱 사이즈의 다이아가 박혀 있는 반지 중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 남자가 낄 수 있는 반지 디자인의 종류는 정말 너무 부족해.

개성으로서의 게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게이로서의 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뭐든 조금씩 퀴어한 파격을 즐기곤 한다. 그래서 내심 반지도 조금 더 특이한 디자인으로 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게가 있는 것일수록 클래식을 좇게 된다. 비싼 거는 일단 클래식한 것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도 물론 가지고 있지만, 그런 속물적인 차원으로만 말하는 건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클래식한 방식으로 프러포즈를 하고 싶고, 누구보다 클래식한 결혼반지를 하고 싶다. 이건 어떻게 보면 내 일생일대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를 위한 기념인데, 그때마저 파격적이고 싶진 않다. 물론 퀴어로서의 괜한 자격지심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래도 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나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형식으로 축복 받았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선택한 반지는? 말하자면 리바이스의 501 같은 거, 나이키의 포스 같은 거, 테란의 원팩더블 같은 거. 티파니 밴드 링 중에서 그런 수준이라고들 하는 밀그레인. 그래도 가운데는 플래티넘으로, 위아래는 옐로우로 된 걸 샀다. "이걸로 할게요." "아 네 밀그레인이요? 알겠습니다. 신부님 사이즈는 알고 계세요?"

지난 며칠간 내 가장 큰 고민은 형의 반지 사이즈를 어떻게 측정하느냐였다.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방법은 형이 끼고 있는 지금의 커플링을 종이에 대고 그려서 그 종이를 가져가는 것이었는데, 우리 둘 다 평소에 반지를 빼지 않으니 이것 참 곤란한 일이었다. 고양이 목에서 방울을 벗겨내는 심정으로 형이 잘 때 몰래 손에서 빼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 고양이가 덩치는 산만한 데 예민한 걸로는 거의 사춘기 팅커벨 수준이라 그러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방법은 다른 이야기를 하며 정신을 분산시키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형 반지를 빼내 내 손가락 여기저기 껴보다 돌려주는 거였다. 나의 김택용 뺨치는 견제에 한 떨기 히드라처럼 정신이 분산된 형은 별 의심이나 짐직도 못하는 눈치였고, 심지어 내 엄지손가락에 끼워봤더니 거의 맞는 사이즈가 아닌가.

"우선 제 것부터 사이즈 맞춰 볼게요." 나는 손가락에 살이 없고 마디 뼈가 비교적 굵다 보니 로션을 조금 발라 원래 꼈던 반지를 빼냈다. "어머 진짜 평소에 반지를 안 빼시나 봐요." "네, 빠지지도 않고 뺄 일도 없어서요." 반지 사이즈를 재보니 티파니 기준으로는 7사이즈였다. "저는 이걸로 하면 될 것 같아요." "고객님 그런데 나중에 결혼하신 후에 남자분들 보통 살 좀 찌시고 그러시잖아요, 그런데 이 반지가 사이즈 늘리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괜찮으시면 7반짜리도 한 번 껴보시고 선택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 걱정 마세요 저는 제가 살 찌는 게 싫어서 안 찔 거에요." 이래봬도 게이인데 그 정도는 관리 해야죠.

이제 드디어 남자친구 반지 사이즈를 찾아야 할 때가 왔구나. "신부님 사이즈는 알고 계신가요?" "아뇨, 몇 호인지 그런 건 모르는데, 제가 껴보면 알 것 같아요." "아 네, 새끼손가락에 맞으시나요?" "아뇨, 엄지에 껴봐야 알 수 있어요." "아 네.... 네? (흠칫) 네. 그럼 일단 6호부터 드려볼게요." "아뇨, 아뇨, 저보다 사이즈 크니까요, 아주 아주 크니까 큰 거 좀 껴볼게요."

내가 이번에는 굳이 남자에게 줄 반지라고 말을 안 했으니, 직원 분께서 조금 당황했을 것 같기도 하다. 아 네 그럼 8호 한 번 보여드릴게요." "아뇨, 훨씬 커요, 8호로 안 될 텐데;;" 그래도 직원 분께서는 굳이 8호를 보여주셨다. 하긴, 처음부터 9호나 10호를 보여줬으면 보통의 남자들은 여보세요 아가씨, 지금 우리 토끼 같은 여자친구를 뭐로 보고 그러세요? 라고 진상을 떨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시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그 정도가 우리 곰만한 형의 손가락에 맞을 리가 있나. "이거보다 훨씬 크거든요, 훨씬 큰 걸로 줘보실래요?" "아 네, 그런데 사이즈마다 차이가 의외로 좀 있으니 차례로 한 번 드려 볼게요, 고객님."

과연 이 직원분은 내 프러포즈의 대상이 남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단순히 손가락이 엄청나게 굵은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결국 반 사이즈씩 올려서 10호까지 왔을 때에야 내 엄지손가락에 잘 맞는 반지가 되었다. "이게 딱 맞는 것 같아요. 이 사이즈로 주세요. 그 사람 손가락이 좀 많이 굵어서요."

무슨 다이아반지를 산 것도 아니고, 금가락지 두 개 사는데 백화점에서 써본 일시불 중 제일 많이 쓴 날이 되었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허영투성이의 소비라니! 라는 생각도 사실 안 드는 건 아니지만, 내가 퍽 돈을 잘 벌어서 이 정도는 몇 번쯤 질러도 괜찮은 수준의 경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내 심정은 정말 평생에 한 번인데, 라는 마음이다. 뭐 10년 뒤, 20년 뒤 리마인드 링을 훨씬 더 좋고 비싸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평생 같이 살아달라고 말하는 이 순간에, 그냥 제일 싸고 흔한 티파니라도, 티파니를 주고 싶었다.

얼른 고백하고 싶다. 이제 반지는 내 사무실 책상에 일주일 동안 봉인되어 있을 예정이다. 다음주 토요일이 내가 계획해 놓은 프러포즈 데이인데, 일주일을 넘게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걱정스럽다. 직원 분은 쇼핑백에 카드를 넣어주며 손으로 달달한 멘트를 꼭 써서 함께 주라고 하더라. "말로도 고백 하시겠지만, 여자들은 그거랑 별개로 이런 작은 카드 받는 거에도 감동하거든요." 물론이죠. 남자도 똑같아요. 심지어 게이는 더!

(www.snulife.com에 게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PRESENTED BY 덕혜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