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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반지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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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미국의 다수 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면서부터 확실히 동성 커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 전보다 더 커진 것 같다. 특히 광고 분야에서 그 관심도가 유독 높아진 듯하다. 작년 말에는 스스로 게이임을 밝히고 동성 연인과 결혼을 한 미국의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패션 브랜드 런던 포그의 광고 모델로 서기도 했고, 얼마 전 (타코벨이 직접 만든 영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타코벨 신제품을 알리기 위해 게이 커플이 등장하는 영상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 쥬얼리 브랜드 티파니앤코의 광고 화보에서 최초로 게이 커플이 등장했다. 얼마 전 허핑턴포스트에서 그 기사를 보고 괜히 2년여 전 프러포즈를 위해 반지 살 때 생각이 났다. 아래는, 지금은 남편이 된 형에게 프러포즈를 준비하면서 썼던 글 둘 중 먼저 것 하나이다.




2012/11/2 티파니에서 반지를

요즘 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곤해졌다. 이 망할 놈의 회사는 무슨 입사 2년도 안 된 새끼사원한테 3년짜리 사업 전략을 짜라고 아호 진짜ㅇㄴ;ㅣㅏ러;ㅁ허;ㅣ. 그나마 그제는 회사의 모든 팀장들이 모여 회식을 하는 날이라 될 대로 되라며 하던 일 다 던져 놓고 칼퇴근을 감행하고야 말았다. 이미 그날 낮에 대외홍보용으로 코피를 한 번 쏟아 놓은 상태였으므로 주변의 과장님들도 너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으니, 이 정도면 그다지 꿀릴 거 없는 칼퇴근이었다.

몸도 피곤해 죽겠는데 정신은 더 피폐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너무 많고, 다른 팀 다른 회사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팀장의 잔소리는 계속 떨어지고, 다른 팀에서는 다 차과장급이 하는 중장기 사업 전략 수립까지 떠안아 끙끙댔더니 정신이 반쯤 가출을 한 상태였다. 원래는 그냥 일찍 들어가서 따뜻하게 샤워하고 바로 침대에 쏙 들어가 잠들 생각이었지만, 천근만근의 육신을 회복시키기 이전에 내 멘탈을 먼저 위로해 주고 싶었다.

회현역에서 내려 S 백화점 본점으로 갔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그릇, 휴롬,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 이불이랑 베개 같은 거 구경하고 만져보고 하면서 남성복 층으로 내려와 몇 달 동안 찍어만 놓은 페니로퍼 신어 보고 어울리는 바지도 입어 보고 머플러까지 한 번 둘러 보고 하다가 일 층에 내려와 새로 나온 에센스 찍어 발라 보고 샘플 하나만 달라고 졸라 보고, 마지막으로 지하1층으로 가서 초밥이나 달랑 한 팩 사 집에 가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지만, 그날은 그럴 체력도 없고 정신도 없었다. 다만 전부터 생각만 하고 직접 해보지는 못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평일 저녁의 티파니 매장에는 손님이 여자 한 두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직원 중에 제일 인상 좋은 여자분 한 분을 골라 눈을 마주치자 내게 반갑게 미소 지으며 어떤 걸 찾냐고 물어보았다. "반지 좀 보러 왔는데요." "아 네, 여자분께 선물하실 건가요?" "아뇨 남자 꺼요." "아하 네, 직접 끼실 반지 찾으시는 거세요?"

나 같이 까진 게이에게도 이런 건 절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교양 있고 품격 있는 쿨게이가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하고서 말했다. "아뇨, 프러포즈할 때 줄 반지 보러 왔어요." "어......(한 3초 뒤에) 그러니까 손님(액센트)이 남자(액센트)분께 드릴 프러포즈(액센트) 링을 찾으신다는 거죠?" "네." "아... 네......" (5초간 정적)

고도로 훈련된 백화점 매장 직원이라면, 그것도 다른 데도 아니고 S 본점 티파니 매장 직원이라면, 남자가 남자에게 줄 프러포즈 반지를 사러 오는 경우 정도는 대비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직원의 반응은 분명 즉흥적인 것이었다. 뭐야, 티파니가 뭐 이렇게 촌스러워? 맨하튼에 있는 티파니 매장에서는 이런 거 상상도 못할 일이야! 물론 가본 적 없긴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 어쨌든 그래도 이 인상 좋은 여자 직원은 '이 정도 돌발상황에 무너질 내가 아니지, 내가 겪은 산전수전 진상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냐! 이달의 영업사원은 내 차지라고!'라는 식의 작심을 한 듯 다시 비장한 미소를 머금고 "어떤 스타일로 찾으시나요?"라고 물어왔다. "플래티늄에 심플한 밴드 링이요."

지금 끼고 있는 커플링의 10배 정도 되는 가격이긴 했지만, 몇 캐럿짜리 다이아가 박히는 여자용 반지가 아니라 그런지 연말에 받을 성과급을 털면 커플로 맞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프러포즈 반지랑 결혼 반지랑 따로 할 생각은 없으니, 한 번 할 때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이라 반지 하나에 몇 달 쫄쫄 굶어야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냥 연말 정도만 거지처럼 보내면 되겠다는 생각에 그나마 안심이 됐다.

애증의 대상인 "섹스 앤 더 시티"를 달달달 봐온 영향 때문인지, 내 머리엔 프러포즈 반지는 무조건 티파니라는 아이디어가 인셉션되어 있다. 종로3가에서 하면 반의 반도 안 될 반지 값인데, 이게 다 못돼 처먹은 캐리 브래드쇼 요년 때문이다. 이년은 구두랑 가방 사느라 집세도 못 내는 게 눈만 높아가지고......라고 욕하기에는 누워서 침 뱉기구나 하...

어쨌든 반짝반짝 반지를 보니 괜히 멘탈 힐링이 되었다. 날 쥐 잡듯 하는 팀장도 잊고, 거대한 뻥으로 써 내려가고 있는 중장기 사업계획도 잊고, 다음 달로 계획한 멋진 프러포즈 데이만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게이들에게는 아직 너무나도 특이한 방식, 즉 일반들에게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방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야지. 크리스마스 며칠 전 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 조금은 조용하고 가로등 조명 좋은 거리에서, 몰래 준비한 티파니 반지를 손에 들고, 한쪽 다리를 꿇고서 나와 결혼해주겠냐고 물어야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남자친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아 죽겠지 뭐 헤헤.

(www.snulife.com에 게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