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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나의 위로인 만큼, 나도 형의 위로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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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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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주간은 유난히 집에 일찍 들어가질 못했다. 굵직굵직한 보고도 연달아 있었고 잘 굴러가던 일에서 사고도 한둘 터지면서 야근이 잦았다. 하루 종일 이 회의 저 회의 쫓아다니다 저녁 먹고서야 제대로 된 일을 하러 컴퓨터 앞에 앉는 게 다반사다 보니, 밤 11시가 넘어야 지원되는 택시비를 안 챙겨 쓴 날이 드물 정도였다.

야근이 잦다고 술을 적게 먹는 건 또 아니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점심 저녁 식사를 거르지는 않듯이, 야근이 많아도 술자리가 딱히 줄지는 않는다. 정말 바쁠 땐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식사를 거르기도 하지만, 바쁠 때 술자리가 줄어드는 것도 딱 그 정도 수준이다. 특히 우리 팀에는 유난히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모든 때가 술 마실 때이면서 모든 일이 술 마실 명분이 된다. 야근 시작 하기 전 저녁 식사 때 반주로 한 잔, 야근이 끝난 한 밤에 입가심으로 한 잔, 야근이 없는 날에는 오랜만에 야근이 없으니까 한 잔, 이런 뫼비우스의 술자리는 최근 들어 더 잦아진 것 같다. 우리 팀 차장님 과장님들이 이 정도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분들은 아니었는데 최근 집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요즘 들어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꼴이다. 팀을 옮긴 후엔 바쁠 때 말곤 보통 일주일에 야근 한두 번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몇 주째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건 이런 패턴이 아직 끝난 게 아니고 또 언제 제 리듬을 찾게 될지 불분명하다는 거다. 정말 폭탄 떨어진 것처럼 일이 많아 매일 새벽 퇴근하고 그런 건 아니다 보니,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쭉 이렇게 지내게 되면 어쩌나 싶다.

많은 업무량과 긴 근무 시간이 내 삶의 질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맞지만, 단순히 오래 많이 일해서 힘든 것만은 아니다. 그냥 내 업무 자체의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많은 회사원들이 일요일이 되면 다음날 출근 생각에 저녁밥 소화를 잘 못 시키곤 할 텐데, 나는 요즘 금요일 퇴근할 때부터 월요일 출근을 걱정하며 한숨을 쉰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살 때가 좋았는데, 언젠가부터 다음주 월요일 걱정을 이번 주 금요일부터 하고 있다. 연휴가 있어도 연휴 끝나고 회사 돌아갈 생각하며 마음이 편치 못했었다.

반면 남편은 언제나 7시면 퇴근을 한다. 둘 다 회사의 노예로 사는 건 같지만, 어쨌든 형은 7시 퇴근이 보장되어 있다 보니 그게 부러울 때도 참 많다. 남편의 회사는 회식이 잦거나 술을 많이 마시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라, 업무 외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거의 없거나 그 양이 적다. 더불어 나보다 훨씬 능력 있는 형은 형이 하는 업무 자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양도 적다 보니,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나보다 여유가 훨씬 많다.

이 사실은 우리 둘 다 서로 잘 알고 있다. 형도 내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배려를 해주는 거다. 사실 난 하는 꼴만 봐선 꼴등 남편이다. 결혼 3주년 기념일이 다가오지만, 결혼한 후 뿐만 아니라 같이 산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일 저녁 쓰레기 분리수거도 거의 매주 형이 혼자 하게 되고, 술에 정신을 잃고 새벽에 들어온 날이면 내 옷을 갈아 입히고 침대에 눕히는 것도 형이다. 내 스트레스 조금이라도 풀라고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케이크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 놓기도 하고, 내가 주말에 꼼짝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있으면 한 달에 두어 번은 찌개에 지은 밥에 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그런 형에 비하면 난 정말 빵점짜리 남편이다.

내가 형에게 남편 노릇을 잘 못해줘서 미안한 건 단순히 집안일을 형이 더 많이 감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게 부부 생활에 얼마나 큰 부분인지는 누군가와 동거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형에게 미안한 부분이 있다.

요즘 평일엔 내가 항상 늦게 퇴근을 하다 보니, 형과 같이 저녁을 먹거나 데이트를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형은 넉넉잡아도 8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데, 내가 밤 늦게 들어올 때까지 항상 집에 혼자 있게 된다. 지난주쯤 형에게 지나가는 말로 평일 저녁에 나도 집에 잘 없는데, 친구들도 좀 더 자주 만나고 아니면 하고 싶었던 거 배우러 다니거나 그러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형이 대답하길, 자기도 뭐 배우러 다니거나 그런 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일주일에 한 두 번이라도 내가 일찍 퇴근하게 되는 날, 힘들어하는 날 위로해주며 나와 좀 더 오래 함께 있을 기회를 날려 버릴까봐 그러지 못하겠다는 거다.

저녁 6시가 넘어가면 형에게 매일 카톡이 온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거의 매번 오늘도 늦는다고 대답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느꼈던 미안함은 아마 저런 형의 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힘들어하는 거에 대해 나보다 더 힘들어 해주고, 나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 안타까워 해주는 형의 마음.

진심 어린 걱정으로 내 편안을 바라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늦은 밤 쇳덩이 같은 몸을 씻기고 침대에 누우면, 선잠 든 형은 크고 느리고 따뜻한 자석처럼 다가와 나를 안는다. 그럴 때면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형의 마음이 체온으로 느껴진다. 다 처리 못한 이메일이나 내일 오후에 있을 회의 준비 같은 건 그 순간 다 잊을 수 있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 앉은 듯, 내 살에 닿는 형의 살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귓가에 들리는 형의 날숨 하나 하나가 내 돛을 밀어주는 바람이 된다.

형에 비하면 내가 너무 부족하지만, 아직 수십 년이 남은 우리의 항해에서 형이 내게 주는 만큼 나도 형의 위로가 되길 바란다. 형이 나의 남편인 만큼, 나도 형의 남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