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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정체론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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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8년이 지났지만 새해 세계경제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연초부터 중국발 금융불안이 세계경제를 흔들고 있으며 선진국들은 침체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그나마 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미국은 지난 12월 결국 금리를 인상했지만, 11월 산업생산이 1년 전에 비해 1.2% 감소하는 등 경제가 정체하고 있다는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다. 거시경제학의 최대 관심사도 불황이다. 얼마 전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는 미국 경제의 전망을 둘러싸고 정부의 적극적인 수요 진작을 촉구하는 케인스주의자들과 이에 반대하며 구조개혁을 강조하는 논자들이 설전을 벌였다. 그러나 블랑샤르 등의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 불황은 장기적으로도 성장률 자체를 낮추는 이력효과가 있어서 불황의 파괴적인 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목받는 주장은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저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장기정체론이다. 서머스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소득분배의 악화, 이윤 몫의 증가 등으로 저축이 늘어난 반면, 인구증가율 감소와 기술혁신 정체로 투자는 침체되었다. 따라서 미국 경제는 장기실질금리가 하락해왔고 이제 균형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상태인 정체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현 상황에서 통화정책은 한계가 크니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공공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침체기의 재정지출 확대가 성장률을 높여 장기적으로 국가부채비율을 낮출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그의 말마따나 전통적으로 무분별하게 생각되던 정책이 분별 있는 정책이 된 시대가 온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 경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구조적 요인들이 소비와 투자 그리고 성장을 억누르고 있다. 장기실질금리도 오랫동안 하락 추세이며 작년 인플레이션은 1%도 되지 않았다. 물론 한국 경제는 자산버블 붕괴의 가능성이 낮고 제로금리도 아니며 수출의존도가 높아 선진국과는 다르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불안으로 인한 취약성은 더욱 높으며, 엄청난 가계부채와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은 경제를 깊은 침체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요인이다.

정부도 다가오는 경제정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통화정책은 효과적이지 않았고 재정정책은 별로 확장적이지도 않았다. 2014년 4분기에는 세수부족으로 재정지출이 급락하여 성장률을 끌어내렸다. 2016년 예산증가율은 경상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보다도 낮은 3%인데, 연금 등을 제외하면 복지예산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국제기구들이 발표하는, 경기변동효과를 제거한 재정수지를 보아도 작년을 빼면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재정은 긴축적이었다. 이는 역시 정부와 여야 정치권 모두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증가를 크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생산적인 정부지출은 줄여야 할 것이고 국가부채가 가파르게 증가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정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에 재정건전성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정말로 나라살림이 걱정된다면 복지지출을 억제할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증세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거시경제정책이 먹혀들지 않자 정부는 이제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구조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거시경제의 효과적 관리에 실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 개혁의 방향이 수요를 억누르고 경제를 침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장기정체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소득을 높이고 격차를 줄이며, 혁신을 가로막는 경제구조를 바로잡는 개혁일 것이다. 세계경제의 암운 아래 장기정체론이 한국 경제에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