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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유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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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리가 어이없어서 웃는다. 내 안에 섞여버린 그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빙빙 돌다가 노트북에 손을 얹었다. 그는 나를 과거로, 타자로, 히스테리로 밀어냈다. 처음부터 그랬다. "나는 페미니즘 공부 안 해도 돼. 우주와 진리를 알면 되니까. 언어에 갇히기 싫어." 이후 페미니즘을 공부하던 그는 "나도 피해자"라며 공평하게 반씩 생활비를 내고, 자신의 나약한 남성성을 위로해 달라고 호소했다. 마지막 메시지는 이랬다. "너는 너무 극단적이야. 동료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너 혼자서 서 있는 주체가 되어야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다른 사회적 관계가 없었던 그는 내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가 될 때 못마땅하게 여겼다. 정작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나에게 의존한 건 자신이었으면서. 그는 나를 '의존적 인간'이며 페미니즘을 말하는 나를 '극단적인' 사람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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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내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림이 팔려도 그 앞에서 신나게 표현하면 안 됐다. 그림을 그리는 그가 박탈감을 느낄까 봐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경제적 무능과 정서적 무능함, 학습하지 않는 게으름에 내가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면 나의 말은 '구박, 잔소리, 바가지'가 되었다. 그는 내게 고함을 지른 후 미안하다며 말했다. "자꾸 구박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없어?" 감정노동에 지치다 폭발한 여자가 내뱉는 말은 동등한 언어가 되지 못한다.

페미니즘이 거슬리는 남성은 여성들이 피해의식이 너무 크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이 상처받은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바쁘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유아인의 글에서 오랜 익숙함을 느꼈다. 유아인의 말은 새롭지 않다.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가요. 뉴스에서 많이들 보셨죠. '악'이 두려워 그 '악'을 외면한 결과를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익숙한 너도나도 피해자 서사다. 장문의 글에 온갖 추상적인 개념이 가득하고, 페미니즘을 한 줄도 공부한 적 없으면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당당함.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자신이 거를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 페미니즘의 의미마저 자신의 의미로 먹어치운다.

나는 많은 유아인'들'을 만났다. '너에게 배우고 싶다', '너의 글이 너무 좋아'라며 접근한 의미 중독자들. 남성 인간 주체의 주체뽕, 예술뽕, 해탈뽕은 고질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에 끌렸을까. '나도 여자만큼 피해받았어. 나도 착취받았으니 보살펴줘, 5 대 5로 데이트 비용도 내야지. 보살피는 게 페미니즘의 윤리 아니야? 하여튼 나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거야' 하는 속셈이었을까. 놓기 힘들 거다. 세상의 주인공은 주체인 나, 의미를 쥔 자신이니까. 달콤할 거다. 타자를 히스테리한 존재로 눌러버리는 우월감은. 타자를 걱정하면서 얻는 도덕의 주체가 된 우쭐함은.

'말하는 사람과 눈 마주치기. 몸통을 그에게 향하기. 고개 끄덕이기. 판단 중지. 답 내리지 않기.' 평화교육 모모에서 진행하는 평화감수성 워크숍에 참여했다. 위 방법은 타자와 관계 맺기 위한 '평화감수성'의 기본자세다. 의미를 추구하기 전에 눈앞에 있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