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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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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

네팔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홈스테이를 할 때였다. "소녀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12살 스와리카와 어머니가 말했다. 스와리카의 어머니는 인물화를 가르쳐주길 바란 것 같다. 그러나 소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어떻게 그리는지 가르쳐주기는 싫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웠을 때 아이에게 소곤거렸다. "스와리카, 사실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없어." 그녀는 놀라운 듯 쳐다봤다.

"봐봐" 하고선 흰 종이에 아무렇게나 물감을 칠했다. 종이의 흰 공간과 물감 색이 선과 면이 되어 무질서하게 널브러졌다. "잘 보면 이 안에 소녀가 보일 거야" 하면서 낯선 색깔, 패턴 사이에 보이는 소녀를 따라 그렸다. 뒷모습 소녀, 비를 맞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보이는 대로. 종이를 바라보면 소녀가 보여. 마음에 있는 게 보이는 거야. 그걸 따라 그리면 돼. 스와리카도 그릴 수 있어." 붓을 주었다.

그녀는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붓칠을 하더니, 구부려 앉아 곰곰이 종이를 바라봤다. 얼마 안 있어 "찾았다!"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땅콩만한 다리, 찌그러진 얼굴의 소녀가 나타났다. 흰 공간에 눈을 그리면 눈 주변 물감은 소녀의 머리카락이나 몸통이 된다. 무질서한 패턴이 선과 만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됐다. 스와리카는 신이 나서 다른 것도 그리자고 했다. 우리는 삐뚤빼뚤하고 흐물흐물한 그림으로 소통하며 놀았다. 어머니가 결과물을 보고 좋아하셨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그림은 미술시간에 좋은 점수를 받기도 힘들 것이다. 다만 그녀는 어디서나 소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흰 종이에서도, 침대에 누워 바라본 천장에서도, 벽지의 얼룩에서도.

그녀와 헤어질 때 한국어로 편지를 써줬다. 편지를 받은 스와리카는 뜻을 무척 궁금해했다. "비밀이야. 언젠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무슨 뜻인지 물어봐." 외국인 친구들과 헤어질 때 종종 한국어로 편지를 써준다. 편지를 빌미로 상상과 설렘을 선물하는 거다. 내 짧은 영어로 미처 담지 못한 마음을 쓰기도 하고, 방명록처럼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을 쓰거나 영원히 읽히지 않는 일기를 쓰듯 구구절절 속내를 쓴다. 그들에게 내 글자는 그림으로 보일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곳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언어가 있다. 느껴지는 마음을 겨우 몇가지 그림과 언어로 주고받는 소통이다.

내가 동양인, 황인종, 한국인, 여성, 20대, 비영어권 인간이라는 것은 이 소통의 공간에서 중요하지 않다. 코즈모폴리턴, 절대적 환대와 세계시민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능력이 아니라, 더 많은 무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무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의 눈빛과 미세한 떨림, 의도, 맥락에 더 집중한다. 그들도 나에게 그렇다.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착각은 폭력을 휘두를 근거가 된다. 내가 무엇을, 누군가를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권태와 오만, 혐오.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에 환대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환대를 느끼는 이유다. 정직한 무지가 서로를 가깝게 한다.

나는 아직도 삶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몰라서 걸어다닌다. 편지 마지막에 꼭 쓰는 말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읽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으니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