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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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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가 왼쪽 뒷다리를 들고 나를 본다. 다리 안쪽을 만져달라는 거다.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오른쪽 뒷발로 서서 버티고 있다. 커리의 미간, 이마, 정수리, 볼을 살살 긁어주면 눈을 감는다. 잠들 때 커리는 내 옆구리나 다리 사이에 들어와 살을 맞댄다. 악몽을 꾸는지 자면서 팔다리를 움찔하고 낑낑거리면, '괜찮아, 괜찮아' 하며 토닥여준다.

커리는 한 살. 6개월 전 보호자를 만났지만 헤어졌다. 갈 곳 없는 커리의 상황과, 바다와 산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는 나의 시기가 맞아 3개월 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커리는 '강아지 몰티즈 수컷'이다. 새벽에 편의점에 다녀올 때, 집 밖에서까지 들리는 곡소리를 내는 커리를 보면서 분리불안장애가 있는 걸까, 고민했다. 전 주인에게 학대당한 건 아닐까, 안쓰러운 마음에 한동안 커리를 동정했다. 부담스럽기도 했다. 커리가 나를 너무 사랑하는 건가, 너무 의존하는 건가. 나는 커리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커리의 사랑스러움에 취해 내게 사랑을 가르쳐주는 존재라고 치켜세웠다. 커리는 나의 '강아지'였고 나는 커리의 주인, 보호자,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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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바닷가로 나와서 커리는 몇 초간 바다를 응시했다. 최선을 다해 달리는 나보다도 빠르게 모래사장 끝과 끝을 맹렬히 오갔다. 첫 수영인데 커리는 나보다 능숙하게 물장구를 쳤다. 바다에서 커리는 용맹하고 자유로웠다. 벽면이 막힌 집, 도로로 가득한 이 세상은 커리에게 얼마나 비좁을까. 내가 커리를 인식하는 틀도 얼마나 좁은 걸까. 얼굴을 모래사장에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커리의 눈높이로 보는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네발로 기어다니면서 커리와 눈을 마주쳤다. 나보다 검고 커다란 눈동자를 번뜩이는 커리. 커리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자리의 얼굴, 돌고래의 얼굴, 나의 얼굴이 있듯 커리에게도 얼굴이 있다. 커리의 강아지성, 몰티즈성, 수컷성은 흩어지고 커리만 남았다. 커리는 불쌍한 '애완'견, 귀염둥이 강아지가 아니다. 그냥 커리다. 이 비좁고 눅눅한 세계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고마운 타자다. 나는 커리의 주인, 엄마가 아니다.

'죽음' '인류' '혁명' 이야기를 써내려가다가 뒤를 돌아 커리를 보면 전투력을 상실한다. 깊은 고심을 안고 웅크리고 있으면 눈치 없게 뽀뽀를 해댄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사회의 역할극, 인간의 역할극에서 나를 로그아웃시켜 준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듣고, 보고, 느끼는 존재가 옆에 있다. 이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타자가 그렇듯. 커리에게 나는 어떤 움직임일까. 내게 커리는 수피 같은 존재다. 이슬람의 수피 라비아는 지옥에 물을 끼얹고 천국에 불을 지른다. 나의 냉소에 불을 지펴주고, 의미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어주는 커리. "정신 차려!" "나를 봐.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멍."

인터넷에서 '강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검색해봤다. 레게음악이 좋다고 한다. 아침마다 레게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았다. 커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커리는 취향이 없을까? '인간이 좋아하는 음악'이 덩어리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커리가 좋아하는 선율과 리듬이 있을 거다. 언젠가 커리와 노래를 만들고 싶다. 철썩거리는 파도, 커리의 곡소리, 학학 웃는 소리와 내가 멍멍 짖는 소리로 만든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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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