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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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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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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려고 했어요?" 인도에서 만난 한국 남자가 내 어깨의 타투를 보고 말했다. "왜요? 이게 뭐 어때서요?" "여기서는 괜찮은데 한국 가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무례한 걱정만큼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하는 타투는 편견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일이다.

타투는 내 의미를 각인하는 것인데 어떤 시선에서는 낙인으로 돌아온다. 타투가 범죄자의 낙인이거나 종교의 부적이던 역사는 길다. 나에게 타투는 낙인이라서 부적이다. 편견이 많은 사람을 막아주는 방패랄까. 타투 덕분에 '여자가 타투를 하면 싸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인연이 닿지 않아서 좋다.

첫 타투는 4년 전 네팔에서 했다. 손목에 칼을 그은 자국 옆에 재탄생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트리스켈리온을 새겼다. 죽음을 계속 기억하고 싶어서다. 이후로도 각인하고 싶은 의미를 살에 새겼다. 사념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 때 타투를 찾기도 했다. 통증은 사념을 잡아먹는다. 바늘이 생살을 찌를 때 발 없는 생각은 흩어지고 감각만 남는다. 감각이 나라는 걸 알려주는 통증이다. 마취연고를 바르지 않는 게 좋은 이유다.

타투이스트인 동거인 덕분에 피부에 검은 잉크를 자주 흡입하고 있다. 타투는 새겨주는 게 아니라 타투 받는 사람이 잉크를 흡입하는 거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의 사주를 분석해 고유한 기운을 문양으로 만들어 몸에 그린다. 피부의 진동은 사람마다 다른데, 타투로 그들과 닿을 때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라고 한다. 내 피부는 예민하고 산만한 진동이라서 티격태격 여행하는 것 같다고. 피부의 진동처럼 나는 산만하다. 피부 속 그림들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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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른쪽 어깨에는 물로 태어나고 불로 올라가는 생명의 눈이 세로로 누워 있다. 오른쪽 발목에는 불타는 검은 나무 위로 검은 새 네마리가 날아다닌다. 왼쪽 가운뎃손가락에는 분노와 정의의 여신 칼리가 있고, 손등에는 꿈에서 본 소라 형상이 미완성 상태로 스며 있다. 손목에는 최초의 숨 '옴'과 수소의 머리뼈 위로 삐뚤빼뚤한 뿔이 자라 있다. 얼핏 보면 볼펜으로 쓱쓱 그린 듯한 선들이다. 나만의 떨림과 호흡으로 살아내겠다는 집념의 무늬다. 영원과 연속성을 상징하는 뫼비우스는 목 뒤에서 회전하고 있다. 마녀가 된 덕분에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난 릴리스는 왼쪽 어깨뼈에서 나를 지켜준다. 피부라는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나의 진동이 발화된 형상들이다.

출생률, 사망률을 관리하는 국가 아래서 몸은 이래저래 감시받고 관리된다. 버림받지 않으려면 건강해야 하고, 표준의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한다. 몸무게를 늘리거나 빼고, 통증을 피하거나 숨기면서. 사람들의 고유한 피부의 진동만큼이나 다양한 몸들은 사라진다.

내 몸이 정말 내 몸인가. 아무리 저항해도 몸은 전방위적으로 압박받는 전쟁터다. 그들이 몸을 압박하는 이유는 '몸'과 '나'를 분리시키기 위해서다. 타투는 내 몸이 존엄을 외치는 방식이다. 몸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은 규격화되지 않은 몸의 자부심이다. 납작한 표준보다 낙인찍힌 몸이 낫다.

'목을 베인 그 여자, 아가미 얻었습니다.'(진은영) 귀 밑에 작은 아가미를 만들기로 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몸에도 그림이 많아지고 있다. 검은 잉크를 먹은 캔버스 같은 몸들과 거리를 쏘다닌다. 규격화된 몸이 지배하는 거리에 균열을 보태고 싶다. 깨끗한 몸 말고, 더러워서 고유한 몸으로.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