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홍승희 Headshot

엄마의 정체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공항에 부모님이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멀리서 발견한 뒷모습. 의자에 앉아있는 엄마, 아빠의 등이 허리를 굽힌 구름같이 포근해 보인다. 시간이 흘렀다. 삶의 시간이.

엄마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나를 안아줬다.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엄마가 피곤하게 졸고 있다. "엄마, 내 무릎에 누워서 자." 엄마는 몇 분 무릎에 누웠다가 일어나 말했다. "아니야. 승희 무릎 아프잖아. 엄마는 괜찮아." 집으로 도착할 때 즈음, 아빠가 한국에 정착하지 않는 내게 타박한다. "넌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니". "난 이렇게 사는게 좋아." 본격적인 아빠의 짜증이 시작됐다. 아빠는 여전히 눈치를 주고, 엄마는 눈치를 본다.

오랜만에 도착한 부모님의 집. 늦은 시간 엄마는 국물이라도 먼저 먹으라며 식탁을 차려주었다. 왠지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식탁에 앉았다. 마주한 엄마의 얼굴에 주름살이 보인다. 엄마의 주름살 만큼, 나는 엄마의 피를 빨아먹으며 자랐다. 엄마는 내 머리를 빗겨주고, 발톱을 깎아주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내가 먹던 그릇까지 씻겨주고, 오늘 입을 옷도 골라주었다. 나에게 엄마는 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그 신은 사라졌다. 신이 사라진 세계는 무기력했다. 공부는커녕 아침에 학교로 가는 발걸음도, 친구들의 수다와 선생님의 성공예찬도 참을 수 없이 무의미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했고, 파업을 했다. 엄마라는 직업. 엄마의 역할에서. 엄마는 떠난 후에도 종종 집에 들려 언니와 나의 치아와 마리카락과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쌓인 설거지와 방문 틈의 먼지를 제거하고 반찬통과 빈 밥통을 채워주었다. 우렁각시처럼. 엄마가 그런 일만 하고 사라지고 나면, 그 일이 엄마의 존재이유가 된 것 같아 슬펐다. 그동안 엄마의 노동에 무임승차를 해왔으니까. 나는 아빠처럼 게을렀으니까. 아니, 그건 당연히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1

중학교 때였다. 어느 날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친척들은 집으로 찾아와 엄마를 "바람난" 무책임한 부모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런 여자"인 줄 몰랐다면서. 화가 났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엄마는 다만 사랑하면서 살고 싶은 인간일 뿐이라고요." 신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찢어졌지만, 엄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뜨거운 목욕물을 받아주었다. 밥을 먹고 설거지물에 밥그릇을 담궜다. 그리고 리시캐시 강가에 들어간 후 한번도 씻지 못한 몸을 욕조에 담궜다. 뜨거운 물로 몸을 뿔리고, 때를 벗겨냈다. 욕조에 누워 나른한 몸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매일 때 묻은 욕조를 닦아왔구나. 작은 설거지통에서 가족이 먹다 남긴 음식물찌꺼기, 냄새 나는 하수구를. 찌든 밥풀을 미리 물에 담그고,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수세미로 그것들을 밀어냈구나. 엄마는 가족의 더러움을 씻겨주는 신인가. 엄마는 신인가. 그 많은 설거지를 혼자 해내고, 아빠의 언어폭력에도 다음날 아침밥상을 차려내는 엄마는 신인가. 가족은 어머니라는 신을 믿는 종교인가.

어느새 내 나이 스물 일곱. 하고 싶은 게 많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타투를 하면서 인도를 돌아다니고, 주역타로로 사람들과 교감하고, 생명의 진동을 글과 그림으로 뱉어내고, 고아에 가서 트랜스 음악을 들으며 밤새 춤을 추고, 낙태죄가 폐지되어 온통 환호성을 지를 그날에 설렌다.

나와 같은 스물일곱 살의 엄마. 그때 엄마는 일곱 살 언니와 다섯 살 나를 키웠다. 실수로 셋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세번째 낙태수술을 했다. 나는 말했었다. "엄마, 나도 남동생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낳지 그랬어. 아쉽다." 엄마는 "그럴 걸 그랬나" 라며 웃어보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엄마는 아이를 낳고 싶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낙태수술 후 몸조리는 잘 했는지도 묻지 못했다.

엄마의 정체는 뭘까. 초등학교 때 엄마와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본 날, 엄마는 나와 언니에게 "사랑하면서 살아"라고 나직히 말했다. 그래, 엄마는 그랬지. 미래의 계획이나 과거의 관습보다 지금의 사랑에 충실한 엄마가 고맙다. 엄마는 신도 노예도, 직업 엄마도 아니다. 나와 똑같이 분노하고 고통 받고 게으르고, 아침에 늦잠을 자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면서 살고 싶고, 때로 훌쩍 떠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욕조에서 나와 익숙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다음 주에 인도로 돌아간다. 아빠는 자꾸 "엄마도 인도로 같이 가. 잘 맞을 거야."라고 말했다. 엄마는 겁이 나서 싫다고 했지만, 내내 인도는 어떤지 물었다. 원숭이와 소, 삐뚤빼뚤한 모래산과 깡마르고 울퉁불퉁한 나무 얘기, 소라모양의 집을 가진 달팽이 얘기를 할 때 엄마의 눈은 생생하게 빛났다. 엄마가 인도로 놀러오면, 우린 발가벗고 강가로 들어가 수영을 할 거다. 아주 오랜 친구처럼 깔깔 웃으면서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