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홍승희 Headshot

'살인마'의 변명

게시됨: 업데이트됨:
ABORTION
Valentyn Ogirenko / Reuters
인쇄

"살인마." "사회정의를 말하면서 살인을 하다니."

지난 5월, 낙태수술 증언 후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에게도 메시지가 왔다. 무엇이 자랑이냐며 타박을 했다. 왜 그런 걸 굳이 올리느냐고. 아빠에게 말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너무 많은 여성이 아직도 혼자 감옥에 갇혀있는 고통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고통을 없애지 못하더라도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하니까. 낙태 논의에서 당사자 인간 여성의 목소리는 없으니까. 누군가는 벌거벗고 말해야만 하니까. 말해져야만 하는 고통이니까요."

2년 전 4월, 언니가 낙태수술을 했다. 이틀 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언니는 수술 후 몸조리를 하느라 방 안에만 있었다. 언니의 고통은 여느 여성들이 겪는 삶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언니 몫까지 열심히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로 밤낮을 울었다. 이 괴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내가 싫어서. 그렇게 거리로 나갔고, 언니의 아픔은 차차 아물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있던 언니는 내게 말했다. "마치 좁은 감옥에 혼자 갇혀있는 느낌이야."

올해 4월, 자주 구토를 하고 식은땀이 났다. 총선 투표를 하러 가던 날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 혹시나 해서 언니가 챙겨준 임신테스트기로 검사를 했다. 결과는 임신. 늦어지면 더 안 좋을 것 같아 다음날로 바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집회의 구호에서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사소한" 여성의 고통. 예외의 고통. 여성의 고통은 늘 예외의 서사였다. 광장에서도, 사회정의에서조차도.


언니가 2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나도 수술대 위에 누웠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눈을 떴다. 희미한 햇살이 회복실로 들어오고 있다. 화창한 토요일 오전. 여느 날이었으면 광장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을 나는 회복실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 왼쪽에 앉은 언니가 울면서 나를 바라본다. 언니는 등을 굽혀 손을 꼭 잡고 슬픈 미소를 지어줬다. "괜찮아 승희야? 많이 아프지. 많이 아팠지. 수술도 잘됐데. 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을 거야" 낮은 천장, 사방이 가로막힌 작은 방에 누워 갓난 아기처럼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오른쪽에 앉아있던 남자친구의 손은 크고 따뜻했지만, 눈물은 그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2년 전 언니도 똑같이 겪었을 그 고통. 나보다 더 차갑고 딱딱한 수술대 위에 누웠을 두려움. 세월호 참사 이후 온통 미친 세상의 거대한 감옥. 그 감옥 안의 작은 독방 속에서 혼자서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 집회의 구호에서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사소한" 여성의 고통. 예외의 고통. 여성의 고통은 늘 예외의 서사였다. 광장에서도, 사회정의에서조차도.

자궁은 뻐근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고, 검은 피가 나왔다. 다리를 벌려봐도, 오므려도, 발버둥을 쳐봐도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몸부림치는 동안 간호사가 와서 진통제를 주사했다. 진통은 천천히 멎었지만 자궁의 진동은 여전했다. 언니 손을 잡고 울었다. 언니. 미안해. 이렇게 아프고 외로운 건 줄 몰랐어. 언니가 말했던 그 좁은 감옥에 있는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해...


고통과 별개로, 엄청난 비극이나 괴상한 일로 여기게 하는 사회의 공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수술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수술 후 낯선 통증이 몸이 꼬일 정도로 나는 아팠지만, 고통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딱히 죄책감이나 세포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건 없었다. 그보다 이런 고통과 별개로, 엄청난 비극이나 괴상한 일로 여기게 하는 사회의 공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낙태수술은 남녀간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남자친구가 이상하네. 그러게 피임을 잘했어야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낙태를, 임신을, 출산을 아주 괴상하거나 숭고한 별개로 인식하게 만든 게 문제다. 남자친구는 대학원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공부 걱정에 나의 임신 걱정까지 어깨가 무거웠다. 그가 대학원 시험을 보기 전날, 그를 데리러 온 부모님을 따라 잠적했다. 그의 삶에서 여자친구의 낙태 수술은 하나의 장애물이었고 그래서 간단히 넘을 수 있는 거였지만, 나는 통째로 삶이 중단됐다.

감미로운 낭만,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로 이 고통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아름다운 음악들은 완전히 뒤집어져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고, 그는 그 괴상한 소리가 아프고 불편해서 떠났다. 사실 사랑도 개인만의 서사가 아니다. 모든 것이 정치이고 사회적인 것이듯. 우리의 관계도 어쩔 수 없이 -아주 뜨겁게 사랑했다 할지라도- 사회의 그물망 안에 갇혀 있었다. 그가 떠난 후 그가 읽던 사회정의를 말하는 백권의 책이 작은 방을 둘러쌌다. 눅눅하고 차가워진 책들은 식은 땀에 열이 나는 내 몸을 무심하게 등졌다. 그만큼의 거리. 사회 정의. 내가 말해온 정의에서 나의 고통은 영원히 말해지지 못할 것 같은 고립감에 몸을 떨었다. 훌륭한 인도 사상가의 책들도, 숭고한 경전도, 민주주의의 언어도 이 고통을 포함시켜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이 고통을 포함시켜주는 언어가 있었다. 여성도 인간이라고 말해온 페미니즘이 그랬다. 수술 후 열심히 페미니즘 서적을 읽었다. 살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낙태비극, 출산찬양, 모성숭배"의 환상을 벗기기 위해.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낙태수술이 합법화된다고 해서 여성들이 웃으면서 낙태를 하러 가겠는가? 불법이 아니어도 고통은 여전하다. 여성도 인간이다.


낙태 증언 후 페이스북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같은 고통을 느낀,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럼에도 왜 이것은 사회문제가 되지 못하는가. "피임을 잘못한 여자의 잘못, 그래서 도덕적인 섹스를 해야 한다는 궤변, 여자가 어떻더라, 남자는 어땠더라" 하는 가십거리로만 회자된다. 새삼스럽지만, 타인의 고통과 삶을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놀랍다. 이런 둔감함이 낙태수술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낙태수술이 합법화된다고 해서 여성들이 웃으면서 낙태를 하러 가겠는가? 불법이 아니어도 고통은 여전하다. 여성도 인간이다. 인간이 자기 몸에 생긴 원치 않는 변화를 거부할 권리도 없는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의 고통을 분담해줄 수 있는 사회를 원하는 게, 과한 요구인가. 이기적인 욕심이고 살인마의 변명인가.

글을 쓰면서 걱정이 된다. 이 글을 "낙태수술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로 읽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여성들이 더 많은 죄책감을 가지게 되거나, "그러니까 역시 여자가 몸 간수를 잘해야 해."로 귀결되는 오독이 있을까봐. "그래서 남자를 잘 만나야 해."라는 괴상한 궤변이 있을까봐.

낙태. 애기를 죽인 게 아니라 임신을 거부한 거다. 낙태가 아니라 그냥 임신 중단. 임신 거부다. 내 몸이다. 내 선택이다. 임신중절수술은 고통스러우니 피임에 신경 쓰는 거다. 그럼에도 실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임신 중단 수술을 하는 거다. 이게 살인이고, 대단한 비극이고, 위험한 불법인가?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뿐이다. 출산을 하는 사람도, 낙태수술을 하는 사람도, 모두 자기 삶의 선택이다.


앞으로도 나는 임신을 할 생각이 없다. 모성도 없느냐고? 아니,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 모성으로 숭고한 어머니가 될 여성이 아니라, 그냥 사랑하며 사는 인간이란 말이다. 대단히 특별한 모성본능, 출산의 기쁨과 숭고함. 사실 이것들은 만들어진 환상이 아닌가. 모성을 인질로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족, 임신과 낙태수술을 제한하는 문화의 공기가 더 무섭다. 모성본능? 누가 만들어낸 본능인가? 누구를 위한 언어인가? 왜 여성에게만 모성을 떠넘기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여성에게 죄책감을 조장하는가. 숭고한 모성, 아름다운 출산, 어머니 숭배에 대한 지독한 환상부터 깨야 한다.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뿐이다. 출산을 하는 사람도, 낙태수술을 하는 사람도, 모두 자기 삶의 선택이다. 임신도, 임신중단 수술도, 섹스도, 섹스를 거부하는 것도 모두 권리가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거대권력보다, 지금 내 눈에 낀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문화의 폭력을 들춰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것들은 단단히 내 오늘을 주무르고 있으니까. 이성애 판타지, 결혼 환상, 출산, 모성애, 가족 이데올로기를. 생각보다 폭력의 뿌리는 깊고, 그 뿌리는 문화의 얼굴, 아름다운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모성과 여성에 대한 찬양 속에서 여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출산부, 모성기계로 존재해왔다.

언니의 몸처럼, 내 몸도 불법이 됐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존재이기 전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살인마라고 부르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살인마라고? 웃기는 소리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상처를 받아서 마음을 닫은 불쌍한 여성도 아니고, "출산의 기쁨을 겪지 못하는" 비극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면서 살고 싶고, 사랑하고 있다. 나는 이대로 온전하다. 여성들을 고립과 억압 속으로 몰아온 "낙태 비극, 출산 환상"의 감옥을 부수고 싶을 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Close
폴란드 낙태금지법 반대시위
/
페이스북
트윗
AD
이 기사 공유하기
닫기
기존 슬라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