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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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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모른다

(0) 댓글 | 게시됨 2017년 10월 11일 | 06시 43분

paint

네팔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홈스테이를 할 때였다. "소녀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12살 스와리카와 어머니가 말했다. 스와리카의 어머니는 인물화를 가르쳐주길 바란 것 같다. 그러나 소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어떻게 그리는지 가르쳐주기는 싫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웠을 때 아이에게 소곤거렸다. "스와리카, 사실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없어." 그녀는 놀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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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싶다

(1) 댓글 | 게시됨 2017년 09월 16일 | 05시 07분

하루 종일 인터넷을 붙잡고 있다. 예술인복지재단 창작지원준비금 신청을 하려고 오전 10시부터 눈 뜨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지금까지 씨름 중이다. 사이트는 폭주해서 다운되고, 전화를 해도 통화 중이고,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다. 신청시간은 오늘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선착순 지원이라서 재빠르게 이 시간 안에 예술인경력증명시스템 사이트에서 서류를 첨부하고 작성해서 제출해야만 한다. 이 시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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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의 얼굴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9월 12일 | 03시 57분

커리가 왼쪽 뒷다리를 들고 나를 본다. 다리 안쪽을 만져달라는 거다.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오른쪽 뒷발로 서서 버티고 있다. 커리의 미간, 이마, 정수리, 볼을 살살 긁어주면 눈을 감는다. 잠들 때 커리는 내 옆구리나 다리 사이에 들어와 살을 맞댄다. 악몽을 꾸는지 자면서 팔다리를 움찔하고 낑낑거리면, '괜찮아, 괜찮아' 하며 토닥여준다.

커리는 한 살.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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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사람들

(1) 댓글 | 게시됨 2017년 08월 15일 | 00시 58분

대한민국효녀연합 퍼포먼스로 언론에서 오르내리고, 여성혐오 커뮤니티에서 내 이름이 자주 등장했을 때였다. '통합진보당 활동 경력이 있는 전문시위꾼, 종북 빨갱이, 간첩'이라는 비난이 주가 되었다. 분단국가에서 빨갱이로 낙인받는 건 익숙한 일이다. 그런 낙인은 이제 우습다. 연대해줄 시민들이 있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한 게시물을 읽고 심장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문란해 보인다. 돈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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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캔버스

(1) 댓글 | 게시됨 2017년 07월 18일 | 00시 32분

"어쩌려고 했어요?" 인도에서 만난 한국 남자가 내 어깨의 타투를 보고 말했다. "왜요? 이게 뭐 어때서요?" "여기서는 괜찮은데 한국 가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무례한 걱정만큼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하는 타투는 편견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일이다.

타투는 내 의미를 각인하는 것인데 어떤 시선에서는 낙인으로 돌아온다. 타투가 범죄자의 낙인이거나 종교의 부적이던 역사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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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 된 풀잎, 괴물이 된 사람들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6월 20일 | 01시 37분

한 가수가 대마초를 흡입했다고 시끄럽다. 대마초는 국가가 불법으로 정한 풀때기다. 옛날 옛적부터 한반도에서 옷과 한약으로 친근하게 쓰였고 가난한 민초들은 비싼 담뱃잎 대신 대마잎을 말아 피우기도 했다. 풀잎은 박정희 정권에서 불법이 되었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국가가 정한다. 술과 담배는 국가가 허락한 마약이라서, 마음을 진정시킬 때 나는 담배의 도움을 받는다.

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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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당신을 찬성할 자격이 없습니다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5월 23일 | 01시 09분

"합법화를 통해 동성애가 보호되면 가장 큰 문제점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많은 국민의 양심과 표현, 종교와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는 데 있다." ㅎ대학 학보에 실린 동성애 합법화 반대 칼럼에 있는 문장이다. 같은 주제의 기사가 두 번씩 연이어 게재되었고, 학생들에게 비판을 받자 학보사는 "특정 인물에 대한 비난, 욕설, 범죄의 소지가 있는 글을 제외한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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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4월 24일 | 23시 56분

일주일 전, 평소처럼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팔이 떨리고 목구멍에 멍울이 걸린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했다. 다음날, 새벽 내내 게걸스럽게 울었다. 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눈물이다.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건지 모른다. 허무와 분노, 열망과 무기력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증상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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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방에서 촛불을 켠다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3월 28일 | 04시 21분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꿈을 꿨다. 2년 전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잠들었을 때 꾼 꿈이다. 손목보다 가늘고 딱딱한 황금색 나무줄기 위로 반쯤 굳은 노란 액체가 감싸고, 맨 위에 초록색 풀이 두 가닥 자라난 나무가 정수리에 박혀 있었다. 나무가 신기해서 손으로 줄기를 만지는데 좁쌀만한 검은 벌레가 이마로 떨어졌다. 하나, 둘을 잡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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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꽃이 아니라 인간이다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3월 08일 | 23시 51분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 경험을 연재하면서 남성들에게 많은 댓글과 메세지를 받아왔다. 대표적인 메세지는 이런 것들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다" "필자가 그런 남자들만 만나고 너무 극단적인 경험만 해온 것 아니냐" "자극적인 소재로 인기몰이 하려는 거냐" "강간범을 신고 안 하고 뭐했어?! 신고해!" "남자도 비슷하게 힘들다, 너무 남자 여자 갈등을 부추기지 마라"고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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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채식주의자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2월 28일 | 00시 54분

"그럼 뭘 먹고 살아요?" "치킨도 삼겹살도 못 먹어요? 어쩜."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요." "채식주의자 처음 봐요. 멋있어요."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면 대개 돌아오는 반응이다. 궁금하다. 고기를 안 먹는 게 어려운 일일까. 나는 채식이 쉬워서 한다. 고기를 안 먹으면 되니까. 채식은 대단한 일도, 유별난 것도 아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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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왜 작은 것에 분개할까?

(2) 댓글 | 게시됨 2017년 02월 15일 | 06시 08분

나는 작은 것에 분개하지 않았다

나는 김수영 시인을 좋아했다. "시까지도 잊어버리는 삶, 온 몸으로 쓰는 시!"라고 고함치는 맨 몸의 진정성이 좋았다. 그가 우산이 부서지도록 마누라를 때린 것을 시로 적어놓아도 특별히 부대끼지 않았다. 그의 시 중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에서 "나는 왜 작은 것에만 분개하는가"를 말하며, 시인은 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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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억압도 정치적인 것이다

(2) 댓글 | 게시됨 2017년 02월 01일 | 06시 49분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

동거하기 전, 우리는 자주 모텔에 갔다. 섹스할 곳이 없었으니까. 모텔은 비싸서 DVD방에서 황급히 일을 치르기도 했다.

어느 날 섹스 후 그가 말했다.
"우리, 이제 너무 자주 모텔에 오지 말자."
"응. 왜요?"
"사람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어. 혁명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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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삶아 먹고 산다

(0) 댓글 | 게시됨 2017년 01월 24일 | 00시 22분

얼마 전 전시 기획자가 전시회를 함께하자고 연락했다. 전시장을 빌릴 여력이 없는 젊은 작가에게 좋은 기회라면서, 제도권 전시 경력이 부족한 나의 이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젊음은 이력을 만드는 시간일까. 예술검열로 싸우는 시국에도 어떤 청년 예술가는 자본과 국가의 전시장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 나의 '위치'를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나이와 함께 늘어간다. 멘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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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집회에 데이트 하러 왔니?"

(2) 댓글 | 게시됨 2017년 01월 16일 | 00시 38분

집회에서 감춰야 하는 여성성

2008년, 열아홉 살이던 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대학 졸업반이었다. 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하이힐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갔다. 나에게는 이게 평상복이었고,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광장에서 자주 마주치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데이트 하러 왔니?"

집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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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잘하는 수컷으로 인정받고 싶니?

(2) 댓글 | 게시됨 2016년 12월 31일 | 05시 22분

열아홉 살 때였다. '남자다운 남자'가 이상형이었던 나는 세 살 연상의 남성스러운 학군단(학생군사교육단) 남자를 소개받았다. 그는 과묵하고, 듬직하고, 자상했다.

화이트데이였다. (찝찝한 첫 경험 이후 화이트데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기념일이 싫다.) 어쨌든 그는 화이트데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줄 것이 있다며 나를 집으로 유인했다. 알았다. 우리가 섹스하겠구나. 뭘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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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기여하지 않기

(0) 댓글 | 게시됨 2016년 12월 29일 | 06시 23분

일 년 전,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소와 돼지를 가득 실은 차를 봤다. 돼지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돼지의 눈망울은 탁한 내 눈과 다르게 또렷하고 맑았다. '인간은 동물을 열등하다고 했지만, 도대체 저들이 뭐가 열등하다는 건가?' 생각했다. 육식이 새삼스럽게 잔혹해졌다. '이제 돼지를 먹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오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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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된 괴물들

(1) 댓글 | 게시됨 2016년 12월 27일 | 00시 52분

세월호 참사 당시 언론은 보험액이 얼마인지, 유병언 아들이 동거하다가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은 안전에 불안을 느꼈다. 수학여행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 혹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죽음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죽음 앞에서 대한민국은 참 잔인했다. 타자의 고통은 일상적인 재난 방송이 된 걸까.

얼마 전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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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없는 폭력

(0) 댓글 | 게시됨 2016년 12월 03일 | 07시 00분

몇 개월 전 녹색당 전 청년운영위원장의 성폭력 사건이 있었다. "당신이 남고 내가 떠나는, 당신은 활개 치고 내가 피하는 이 세상이 너무 싫다." 녹색당을 떠난 피해자가 남긴 글이다. 나는 얼마 전에야 이번 사건을 알게 되었다.

최근 데이트폭력에 대해 대화하던 중,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피해여성의 고통에는 공감하지만, 그녀의 증언에 동조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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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이상 효녀라고 부르지 말라

(0) 댓글 | 게시됨 2016년 11월 17일 | 00시 26분

올해 1월 내 삶에 해일이 밀려왔다. 위반부 한일협상 반대 예술행동에서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한 날부터다. 대한민국 효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오르내렸다.

관종, 종북이라는 비난은 익숙했다. 비난보다 칭찬이 불편했다. 나는 효녀도 아니고 그리 도덕적이지도 않고, 내키는 대로 막산다. 예술가라고 스스로 명명하지만, 예술가라는 존재도 의심한다. 끈기도, 인내심도 없다. 주의 산만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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