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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 두 '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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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흰 드레스 셔츠를 입어야 할 자리가 있었다. 옷장 깊은 구석에 걸려 있던 옷을 오랜만에 꺼냈다. 걸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동안 내가 이 셔츠를 방치했던 이유가 새삼스럽게 생각이 났다. 문제는 젖꼭지였다. 다른 말로는 유두, 얇은 한 겹 너머에서 필요 이상으로 선명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두 개의 점. 그날은 실내에서도 재킷을 벗을 수가 없었다. 속옷을 챙겨 입으면 되는 일 아니냐고? 내게 젖꼭지보다 더 감추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셔츠 아래의 '난닝구' 실루엣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과하게 호들갑을 떠는 건지도 모른다. 젖꼭지가 나한테만 달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조심을 해야 하는 걸까? 영화 <하나와 앨리스>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 앨리스(아오이 유)는 광고 모델 오디션에 지원해 발레 동작을 선보인다. 춤을 추는 동안 짧은 치마가 들춰지지는 않을까 캐스팅 디렉터가 염려를 하자 소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한다. "괜찮아요.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맞는 말이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러니까 당사자만 개의치 않는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을 것인가, 아니면 소스를 탕수육에 부어 먹을 것인가 결정할 때처럼 개인의 취향과 소신에 따르면 된다.

콜린 퍼스의 탕수육 입맛이 '찍먹'과 '부먹'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가 셔츠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비비시(BBC) 미니시리즈 <오만과 편견>과 영화 <싱글맨>이 그 증거다. 특히 물에 젖은 흰 셔츠 차림을 공개했던 <오만과 편견>은 1995년 방영 당시, 콜린 퍼스를 영국의 섹스 심벌 자리에 올려놓았던 작품이다. 이 배우는 오디션장의 앨리스처럼 남들의 시선에 큰 거부감이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전세계 시청자들에게도 몸에 찰싹 달라붙은 셔츠를 입은 미남은 딱히 불쾌한 광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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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젖은 셔츠를 입어봤자 섹시하기는커녕 불쌍해 보일 게 뻔한 나는 콜린 퍼스 대신 케리 그랜트(사진)의 조언을 따라야 할 것 같다. 그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거품이 묻지 않도록 셔츠 단추를 여러 개 끄른 채 면도를 한다. 안에 받쳐 입은 반팔의 언더셔츠를 이 장면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겉보기에 훨씬 깔끔하다는 점에서 '난닝구'보다 우월한 대안이다. 특히 속옷의 네크라인을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로저 손힐(케리 그랜트)은 목을 야무지게 감싸는 크루넥(목 부분을 목둘레에 꼭 맞게 둥글게 만든 것) 티셔츠를 선택했는데, 타이를 맬 때는 그편이 지저분한 실루엣을 가리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타이로 단추 몇 개를 끌러둘 생각이라면 브이넥이 적절하다. 잿빛 슈트와 같은 색의 타이에 막 세탁한 것처럼 하얀 셔츠를 매치한 로저 손힐의 스타일링은 누가 봐도 근사하다. 그런데 그의 차림에서는 보이는 부분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한 가지, 손힐의 선택 중에 바꾸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언더셔츠의 색상이다. 흰 반팔 속옷을 고를 경우, 소매가 끝나고 맨 팔뚝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계가 흰 드레스 셔츠 아래로 비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부 톤에 맞춰 밝은 회색 티셔츠를 받쳐 입는 쪽이 불필요한 흔적을 감추는 데 더 유리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1990년대의 콜린 퍼스나 브래드 핏이라면 젖은 걸레를 입고 출근을 하더라도 감히 말릴 생각을 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감추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면 흰 드레스 셔츠와 함께 회색 언더셔츠를 몇 장 구입해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