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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해리, 할리퀸을 탄생시킨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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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코믹스의 동명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본의 아니게 세상을 구할 임무를 떠맡게 된 악당들의 이야기다. 이 액션 블록버스터는 평단의 혹평에도, 개봉 첫 주말에 북미에서만 1억3500만달러를 벌어들이는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거뒀는데, 아무래도 배역에 강렬한 개성을 부여한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은 바가 큰 듯하다. 특히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퀸에 대한 반응은 예고편이 처음 공개됐을 무렵부터 이미 폭발적이었다. 작년 핼러윈 파티는 영화 속 캐릭터처럼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울긋불긋한 화장을 한 여성들에게 점령되다시피 했다. 아마 올해 핼러윈 때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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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로비가 연기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할리퀸.

그런데 원작의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광대 같은 모자를 뒤집어쓴 만화 속 할리퀸은 영화의 묘사와는 꽤나 차이가 있다. 한 인터뷰에서 마고 로비는 지금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밝혔다. 답은 밴드 '블론디'의 리드 싱어였던 데비 해리다. 음악적 동료이자 연인이던 기타리스트 크리스 스타인이 1976년에 촬영한 사진 속의 록스타는, 과연 2016년의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차림이다. 생각해보면 당대의 데비 해리 역시 할리퀸만큼이나 인상적인 팜파탈이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서도 그는 금발 미녀의 클리셰로만 만만하게 소비되지는 않았다. 아담한 체구 뒤로는 늘 위험한 매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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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해리의 솔로 앨범 <쿠쿠>.

1981년의 솔로 데뷔를 통해 데비 해리는 어느 정도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나일 로저스와 버나드 에드워즈는 앨범 <쿠쿠>(Kookoo)를 블론디의 음악과는 차별화되는 펑키한 사운드로 채워 넣었다. 그런데 데비 해리는 시각적인 스타일 면에서도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커버 아트 디자이너로 그가 지목한 인물은 영화 <에일리언>의 크리처를 탄생시켰던 스위스 출신의 아티스트 H. R. 기거였다.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두 사람이 만난 결과물은 꽤 과격한 방식으로 시선을 끈다. 기거는 에스에프(SF)의 전사를 연상시키는 머리 장식을 두른 데비 해리의 두상에 굵은 침들을 찔러 넣었다. 처음에는 뮤지션조차도 완성된 이미지가 지나치게 충격적인 건 아닐까 고민을 했다고 한다. 마침내 앨범과 프로모션 이미지가 발표되긴 했지만 런던 지하철은 역사 내 포스터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 잔인하고 혐오스럽다는 이유였다.

주위의 '엄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비 해리는 H. R. 기거에게 두 편의 뮤직비디오 연출까지 의뢰한다. '이제는 나도 당신이 안다는 걸 알아요'(Now I Know You Know)의 비디오에서 그는 아티스트가 설계한 에스에프적인 지옥도를 배경에 둔 채 주문을 외우듯 흐느적거리며 속삭인다. 그 모습은 할리퀸보다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또 다른 캐릭터인 마녀 인챈트리스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쿠쿠>의 커버 아트와 좀더 흡사하게 느껴지는 마녀는 사실 따로 있다. 호러 장르의 고전으로 꼽히는 마리오 바바의 <블랙 선데이>에서 바버라 스틸이 연기한 아사 바이다다. 침이 촘촘하게 박힌 철가면을 뒤집어쓰는 처형을 당한 뒤 얼굴에 구멍이 송송 뚫린 흡혈귀로 부활하는 아름다운 괴물이다.

<쿠쿠>는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깊은 인상을 남긴 앨범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솔로 뮤지션 데비 해리보다는 블론디의 리드 보컬 데비 해리를 먼저 추억할 것이다. 그럼에도 변신을 갈망하던 섹스 심벌과 당대를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비주얼리스트의 협업은 한번쯤 돌아볼 만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몇 겹의 우연과 필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이상하면서도 흥미로운 만남이니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