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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화 Headshot

알몸보다 섹시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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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작인 <엠마뉴엘>이 한국에서 정식 개봉되기까지는 꼬박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포르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과감했던 표현 수위 때문이었다.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볼 수 없는 영화에 관한 짜릿한 소문은 바다 건너까지 흘러들어왔다.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 시리즈는 국내에서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는 전설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금지된 화제작의 대체재로, 좋게 이야기하면 오마주고 섭섭하게 말하면 아류라고 할 수 있는 <애마부인> 시리즈를 내놓기에 이른다. 말을 사랑하는(愛馬) 육감적인 주인공이 너무 야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검열 당국의 간섭으로 느닷없이 지역 특산물 홍보대사처럼 마를 사랑하게(愛麻)됐지만, <애마부인>은 '엠마뉴엘'과 엇비슷한 제목을 붙여주고 싶었던 제작진의 욕심이 반영된 작품이다.

정확히 기억을 하는데, 1996년에 친구들과 서울 신림동의 한 비디오방에 모여 앉아 <엠마뉴엘> 1편과 2편을 연속 관람했다. 눈치 보지 않고 성인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을 자축하는 일종의 세리머니였다. <원초적 본능> 개봉 당시, 매표소 앞에서 차갑게 내쫓겼던 기억을 곱씹으며 마침내 한국에 상륙한 <엠마뉴엘> 시리즈를 골랐다. 귀에 익은 달짝지근한 테마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예스러운 색감의 영상이 화면을 채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늦게 도착한 파격들이 으레 그렇듯 영화는 기대를 한참 밑돌았다. 신체 노출을 가리기 위한 모자이크는 실비아 크리스털과 공동 주연이라 해도 될 만큼 높은 비중으로 등장했고, 그나마도 몇몇 장면은 아예 잘려나간 상태였다. 틈만 나면 슬그머니 끼어드는 섹스 신에도 금세 싫증이 났다. 2편은 졸다 깨다 하면서 간신히 본 것 같다. 줄거리조차 파악이 안 될 지경이었는데,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줄거리가 궁금해서 본 영화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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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뉴엘>이 다시 궁금해진 건 몇 개월 전 우연히 발견한 스틸 때문이다. 세 명의 남녀가 긴 의자에 늘어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2편의 한 장면(사진)이었다. 부드러운 크림색, 다양한 질감의 갈색, 액센트가 되어줄 푸른색 정도만 사용해 섬세하게 설계한 화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실비아 크리스털이 입고 있던, 기모노를 응용한 듯한 담백한 디자인의 갈색 셔츠 드레스는 우아하면서도 섹시했다. 결국 20년 만에 이 시리즈를 다시 감상했다.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배우들의 맨살보다 입고 있는 옷을 주의 깊게 살폈다.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깨달았는데 <엠마뉴엘>은 걸작과는 거리가 한참 먼 작품이다. 1편에는 그나마 눈여겨볼 만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2편은 변명의 여지 없이 산만한 동어반복이다. 아시아를 성적 모험을 위한 이국적인 배경만으로 묘사한 점 역시 비난을 받아도 싸다. 하지만 장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에도 참여했던 프랑수아 드 라모트의 미술과 클로드 샤브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같은 거장의 조력자였던 코린 조리가 조율한 의상은 이 범작에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훌륭하다.

1편의 엠마뉴엘은 스스로도 몰랐던 열정에 눈을 뜨면서 혼란과 희열을 함께 경험하는 여성이었다. 화려한 색상과 과시적인 프린트는 캐릭터를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는 장치다. 하지만 2편에서 주로 입고 등장하는 건 한결 절제된 디자인의 드레스들이다. 우아한 실루엣으로 몸을 감싼 실비아 크리스털은 전편보다 노련하고 성숙해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인상이랄까? 의상만 놓고 본다면 나는 2편이 좀더 섹시하게 느껴진다. 섹시함을 좌우하는 건 결국에는 노출보다는 태도다. 2편에서 엠마뉴엘이라는 캐릭터는 벌거벗고 있을 때보다 옷을 입고 있을 때 더 선명하게 보인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