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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3인조 강도치사 재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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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할 이야기가 많기에 제법 긴 글이 될 것 같지만, 정말 영화 같은 극적인 이야기이기에 모두들 끝까지 읽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우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해의 편의를 위해 속칭 삼례 3인조 재심 사건에 관한 개략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1999년 2월 삼례 나라슈퍼에서 강도 3인조가 유모 할머니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은 당시 만 18~19세였던 임명선, 최대열, 강인구(이하 '재심청구인들'이라 함)를 그 범인으로 지목하여 폭행과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검찰에 송치하였고, 검찰에서는 그대로 기소하였으며, 임명선과 강인구는 상고를 포기하여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고, 최대열은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유죄 판결이 확정되어(최대열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00년경 재심을 신청하고 그 기각 결정에 대해 항고, 재항고를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음), 각 3년에서 6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출소하였고, 2015년 3월 재심을 신청하여 2016년 7월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으며, 이번 주 10월 28일 재심 판결이 선고될 예정이다.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네이버, 다음 등에서 삼례 3인조를 검색하면 많이 나와 있으니 참조 바람)

장모님은 딸 셋,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가정주부셨는데, 오늘 할 이야기는 17년 전 장모님이 직접 경험하신 것에 관한 것이다.

장모님은 1991년경부터 2004년경까지 전주교도소 천주교 종교위원으로서 여러 천주교회 교우들과 함께 전주교도소를 방문하여, 무연고 수인이나 장기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상담을 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셨다.

1999년경 어느 날 장모님이 봉사활동을 하고 전주교도소 강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려고 할 때에 당시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강재수(가명, 강재수는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장모님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성실하게 생활하고 출소한 후 현재까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특히 전주교도소에서 함께 복역했던 임명선을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던 사람이다)로부터 "임명선을 꼭 상담해주세요. 부탁합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받으셨다.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 후 장모님은 전주교도소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기 위한 예비자 상담시간에 임명선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임명선에게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서 기도를 드려주세요"라고 하셨는데, 임명선은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임명선, 강인구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으로 1, 2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상고를 포기하여 판결이 확정되어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고, 나머지 공범 중 1인으로 지목된 최대열만 상고하여 대법원에 계류 중이었다.

장모님은 처음에는 판결이 확정되어 형을 살고 있는 임명선의 말이 믿기지 않았는데, 약 1시간 동안 임명선과 대화하면서 임명선의 말이 사실이고, 재심청구인들이 유모 할머니를 죽게 한 것이 아닌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한다.

장모님은 임명선으로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전주교도소에서 나온 후 제일 먼저 전주지방검찰청에 전화하여 재심청구인들의 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한 검사가 실제 있는지 등을 확인하셨고, 교화위원 이모씨와 함께 임명선 등을 수사한 완주경찰서에 직접 가서 사실관계 등을 확인하셨다.

완주경찰서에서는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장모님은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하셨고, 다만 이 사건 현장이 어디쯤이라고 들었으므로 교화위원 이모씨와 함께 이 사건 현장 부근에 가셨다.

장모님은 이 사건 현장인 삼례 나라슈퍼에 가서 피해자 최미영(가명, 최미영은 위 슈퍼에서 남편과 함께 물품을 강취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범인과 대화를 하는 등 범인에 대한 단서를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음)을 직접 만나 이 사건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으셨으나, 최미영이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관계로 이 사건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셨다.

장모님은 할 수 없이 그 주변 미장원이나, 길거리에서 만난 동네사람들로부터 사건에 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셨고, 재심청구인들의 집을 찾아가 그 가족들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셨다.

장모님은 임명선으로부터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사건 현장을 여러 번 다녀오셨는데, 이 사건 현장에 처음 갔을 때 대문이 유독 눈에 띄었고, 신문에서 본 기사와 달리 대문이 녹이 많이 슬고 오래되어 힘껏 당기지 않으면 잘 닫히지도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곳에서 자취하는 사람들이 밤에도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수년간 대문을 닫지 않은 채 살았다는 말을 들으셨다(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수사기록에는 재심청구인들이 대문이 닫혀 있어 담을 넘어 위 슈퍼에 들어갔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또한, 현관문에 나 있는 자국이 임명선이 수사기관에서 진술하였다고 하는 드라이버 자국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부위가 눌려져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고, 이에 장모님은 임명선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더 확신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진범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하나씩 발견되자 진실을 밝히고 재심청구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일념 하에 오랜 시간에 걸쳐 손수 모든 조사를 하게 되셨다.


장모님은 우선 재심청구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신문에 난 기사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재심청구인들의 가족을 찾으셨는데, 마침내 임명선의 부모님과 여동생 둘, 고모, 강인구의 아버지, 최대열의 아버지와 누나 등을 찾아가 직접 만나셨고, 서울에 사는 강인구의 고모와 통화도 하셨다.

그러나 어렵게 만나 본 재심청구인들의 가족들은 모두들 생활 형편이 너무 좋지 않아 재심청구인들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이 사건 당일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네이버, 다음 등에서 검색하면 알 수 있음), 재심청구인들의 친인척 및 주변사람들 조차 재심청구인들이 무죄라는 것을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의 가족들에게 재심청구인들이 살인자가 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 같다고 말해주었으나, 가족들은 재심청구인들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재심청구인들의 누명을 벗겨 교도소에서 나와 가족들한테라도 인정을 받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 후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수사기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사기록을 입수하려고 하셨는데, 재심청구인들의 변호인도, 가족도 아닌 상황에서 수사기록을 쉽게 입수할 수 없으셨다.


수사기록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 기록에는 부산에서 잡혔다고 하는 진범에 대한 내사기록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장모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전주지방법원에 수차례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수사기록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 기록에는 부산에서 잡혔다고 하는 진범에 대한 내사기록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입수한 기록들을 살펴보니 변호사가 아닌 장모님의 눈에도 이상한 점들이 많이 보였고, 이에 재심청구인들이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더 확신을 가지셨다고 한다.

장모님은 처음에는 임명선의 말을 듣고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셨는데, 사실관계를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양파껍질이 벗겨지듯이 재심청구인들이 진범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하나씩 발견되자 진실을 밝히고 재심청구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일념 하에 오랜 시간에 걸쳐 손수 모든 조사를 하게 되셨다.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이 무죄라는 확신이 들자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제일 먼저 교화위원 유모씨의 소개로 전주 동산동 본당의 서광석 신부님을 찾아가셨고, 재심청구인들의 억울함과 무죄를 밝히기 위해 여러 신부님과 인권연대 등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상의하고 도움을 받으셨다.

장모님은 최미영을 찾기 위하여 이 사건 현장 관할 동사무소에 가서 최미영의 주소를 물었더니 처음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알려주지 않았는데, 세 명의 청년의 인생이 달린 일이라고 하면서 수차례 찾아가 간곡하게 부탁하여 간신히 최미영의 주소를 알아내셨다.

그 후 장모님은 최미영의 집을 직접 찾아가고, 전화도 여러 번 했지만, 처음에는 최미영이 이 사건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이 사건에 관하여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으나, 계속 연락하여 설득한 끝에 전주 평화동 성당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장모님이 최미영을 만났을 때 강도를 당한 피해물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최미영은 경찰에서 진술할 당시에는 피해금액이 45만원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남편 바지주머니에서 30만원이 그대로 있어 실제 피해금액은 15만원이었다고 말하였는데, 재심청구인들의 수사기록에는 최미영이 잘못 진술한대로 재심청구인들이 45만원을 강취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고, 이에 장모님은 경찰들이 재심청구인들에게 최미영이 잘못 신고한 대로 진술하게 했구나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을 여러 번 번갈아가면서 면회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알게 되셨고, 재심청구인들의 가족들을 만나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으며, 최미영을 데리고 주범으로 지목됐었던 임명선의 면회를 가서 직접 임명선의 목소리를 확인 시켜주기도 하셨는데, 임명선을 면회한 직후에 최미영은 임명선의 목소리가 범인의 목소리와 많이 다르고 범인이 경상도 어투였다고 말하였다고 한다(재심청구인들은 모두 전라도에서 살았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경상도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동영상의 부산 3인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었고, 진범의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하였다.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판결이 모두 확정된 후에, 이 사건에 대하여 재수사가 이루어진 사실 및 재심청구인들과 이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됐었던 부산 3인조와 대질조사를 한 사실도 알게 되셨고, 최미영로부터 부산지방검찰청의 검사가 최미영에게 도난당한 목걸이 등 귀금속의 모양, 색깔 등을 묻는 전화를 했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장모님은 최미영의 말을 듣자마자 이거다 싶어서 곧바로 부산지검의 담당 검사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시고는, 최미영과 그녀의 어린 아들 및 교화위원 이모씨와 함께 미리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부산지검의 담당 검사를 만나러 가셨다.

당시 진범으로 지목된 부산 3인조를 수사했던 부산지검의 담당 검사는 사건이 자기가 생각한대로 종결이 되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는지 장모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묻다가 헤어지기 직전에 범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최미영이 진범의 목소리를 알 수 있는지 물었는데, 최미영이 평소 그 부분을 강조했었던 관계로 당연히 알 수 있다고 하자, 그럼 부산 3인조를 조사할 때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수사관이 강하게 말렸으나, 부산지검의 담당 검사는 영상실에 가서 부산 3인조를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최미영은 위 동영상의 부산 3인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었고, 진범의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하였다.

당시 부산지검의 담당 검사는 이렇게 아줌마들이 쫓아다녀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전문가인 민변 같은 단체를 찾아가 도움을 받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장모님은 최대열에 대한 판결이 확정된 2000년경 부산지검에서 담당 검사를 만나고 온 직후에 당시 전주에 있는 민변 소속 변호사가 있는 ○○법률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하셨다.


교도관들이 괜한 짓을 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어 겁을 먹고 더 이상 재심 청구를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


당시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 모두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려고 하였으나, 임명선, 강인구로부터는 재심에 필요한 서류를 받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최대열에 대한 재심만을 청구할 수밖에 없으셨다.

장모님은 임명선로부터 처음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후로도 약 30~40통의 편지를 주고받는 등 계속하여 연락을 하셨는데, 재심을 청구할 무렵에 임명선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면회가 되지 않는 등 연락이 닿지 않아서 재심에 필요한 서류를 받을 수 없었고, 재심청구인 강인구로부터도 재심에 필요한 서류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장모님이 최근 임명선을 만나 당시에 왜 재심을 신청하지 않았었냐고 물어보니, 임명선은 다른 교화위원들이 재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며 만류하였기 때문에 재심을 포기하였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1999년경 전주교도소에서 임명선을 상담해 달라는 쪽지를 몰래 전달해 준 강재수를 만나 물어보니, 2000년경 당시 임명선이 교도소 내에서 재심을 신청하기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려고 하자 교도관들이 괜한 짓을 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어 임명선이 겁을 먹고 더 이상 재심 청구를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수사기록을 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과, 현장 상황 등과 맞지 않는 부분 등을 ○○법률사무소의 담당변호사에게 설명해주었는데, 진범으로 지목되었던 부산 3인조에 대한 수사기록에는 피해자 망 유모 할머니의 옷차림이나 집안 구조, 부산 3인조가 직접 그린 이 사건 현장의 약도, 망 유모 할머니가 누워있던 위치 등이 그대로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모님은 망 유모 할머니의 딸인 김모씨로부터 망 유모 할머니가 사망 당시 김모씨가 준 옷을 입고 있었다고 들으셨는데, 부산 3인조에 대한 수사기록에는 망 유모 할머니가 입고 있던 색깔이나 모양이 동일한 윗도리가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모님은, 2000년경 최대열에 대한 재심을 신청하였으나, 장모님의 예상과 달리 최대열에 대한 재심사건(전주지방법원 2000재고합1)이 2000년 9월 29일 기각되었고, 이에 장모님은 본인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언론사에 제보하여 2000년 12월 10일 엠비씨(MBC) "시사매거진 2580"에 이 사건에 관한 내용이 방영될 수 있게 하셨다.

장모님은 ○○법률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위 기각결정에 대하여 항고장을 작성하셨는데, 당시 최대열의 가족조차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모님이 직접 광주고등법원에 가서 그 항고장을 접수하셨다.


장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재항고마저 기각되어 최대열이 억울함을 벗지 못한 채로 이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위 항고사건(광주고등법원 2000로6) 역시 2001년경 기각되었는데, 장모님은 20분 분량이었던 위 MBC 시사매거진 2580 방송에서 시간 관계상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에스비에스(SBS) 방송관계자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2002년 5월 18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 1시간 분량으로 방영될 수 있게 하여 이 사건에 대하여 좀 더 상세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하셨다.

재심신청 기각 결정에 대한 항고까지 기각되자 장모님은 장인어른과 함께 서울에 있는 민변 소속의 김모 변호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셨고, 김모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재항고를 하셨으나, 장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재항고마저 기각되어 최대열이 억울함을 벗지 못한 채로 이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최근 재심 전문변호사로 유명해진 박준영 변호사가 2013년 하반기경에 장모님의 집으로 찾아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박준영 변호사는 장모님에게 이 사건의 재심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장모님이 가지고 계셨던 기록을 찾아달라고 하였으나, 장모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기록을 찾을 수 없으셨다.

그 후에도 박준영 변호사는 장모님에게 여러 차례 전화하여 기록을 찾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장모님은 해당 기록을 끝내 찾지 못하셨는데, 그 후 박준영 변호사는 장모님이 최대열에 대한 재심 신청 기각 결정에 대한 재항고를 신청할 때에 도움을 주었던 민변 소속의 김모 변호사로부터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을 받았고, 이를 토대로 2015년 3월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불쌍한 세 청년들을 위해 좌, 우 살피지 않고 약 3~4년 동안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내달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신 장모님


1999년 발생한 삼례 3인조 강도치사 사건의 원본 기록은 보관기간이 만료되어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지 않은데, 앞서 본 바와 같이 장모님이 최대열의 재심을 신청했던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이 사건 재심을 신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장모님이 최대열에 대한 재심을 신청하지 않았었다면, 이 사건은 현재와 같이 다시 재심이 열릴 수 없었을 것이고,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못하였을 것이며, 삼례 3인조는 평생 억울함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는 기자회견장에서 이 사건 재심은 다른 재심 사건과 달리 별로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종전에 장모님이 최대열에 대한 재심을 신청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재심을 진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에 관하여 상세하게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일반인으로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인데, 어떠한 대가도 주어지지 않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며, 가족들조차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꿋꿋하게 억울한 세 명의 청년들을 위해 헌신하신 그 숭고한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이번 주 금요일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재심 판결이 선고될 예정이다. 그들에게는 무죄가 선고될 것이 확실하다. 그 동안의 장모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 될 것인데, 세상은 최근의 결과에만 주목할 뿐 그 과정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에는 무관심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불쌍한 세 청년들을 위해 좌, 우 살피지 않고 약 3~4년 동안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내달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신 장모님 박영희 여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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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재심 결심공판이 10월 7일 전주지법에서 열렸다.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힌 박영희씨(가운데)는 이날 법정에 출석하여 그녀의 딸이자 이 사건의 공동변호인인 백선경 변호사(왼쪽에서 세 번째)의 증인신문을 통해 이 사건에 관한 증언을 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