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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의 역할을 확인시켜준 창극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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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의 대표작 '산불'(1962년 국립극장 초연)은 한국연극사에서 결정적인 매듭이자 우뚝한 봉우리이다. 식민지 시기 이래로 이 땅의 작가들과 연극인들이 도모해왔던 근대적인 사실주의 연극의 토착화 노력이 이 작품에 이르러 한 고전적인 형태로 결실을 맺었으며, 이후 새로운 서구 연극사조의 계속적인 유입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자주 공연되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의 지위를 누려왔다. '산불'은 유행의 잦은 교체도 견뎌낼 만한 고전적인 완성미를 갖춘, 한국연극사를 통틀어서도 드문 작품이며, 그런 이유로 실험적인 양식이 활용된 경우까지도 포함하는 다채로운 공연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작품이 지나간 시대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향토색 강한, 전근대적인 문화가 온존하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문학의 고전들은 비슷한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런 토착문화에 대한 기억은 물론이고 문화에 의해 매개된 향수마저도 옅어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극 장르에 국한시켜 중요한 문화적 변동 상황을 말하자면, 이 작품이 노련한 극적 전개를 통해 결말에서 폭발시키는 비극적 정조가 과거에는 진지한 극문학이 지향하는 바였다면 현재는 그런 조직적인 플롯 운용,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환기되는 비극적 정조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 상황이다. 그래서 '산불'의 창극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의아하면서도, 퍼뜩 '아! 이제 세월이 바뀌어 이 작품은 전통적인 것과 더 가깝게 여겨지게 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공연은 이런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넉넉하게 당대성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런 성과는 여러 새로운 시도를 통해 현재 계속 진화 중인 국립창극단의 축적된 역량에 힘입은 바 큰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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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으로 각색된 고전 '산불'

공연을 마무리 짓는 압도적인 이미지가 준비되고 구축되는 방식이야말로 이 공연의 취지와 성과를 이해하는 열쇠이지 싶다. 그 전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한 작품이기에) 작중 상황만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195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가 시간적 배경이고 빨치산이 출몰해서 공출을 거둬가기도 하는, 소백산맥 깊숙이 자리한 한 두메산골이 작품의 무대가 된다. 전쟁통에 전사하거나 이념갈등으로 학살당하는 등 마을의 남성들이 거의 다 죽다시피 해서 과부들만 사는 그 마을에 규덕이라는 이름의 빨치산 이탈자가 잠입하게 되고, 이웃한 젊은 과부들인 사월과 점례가 동시에 규덕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중심사건이다. 국군 토벌대가 빨치산 몰이를 위해 '산불'을 놓으면서 마을 뒤편 대나무숲에 은신하고 있던 규덕이 발각되어 사살되고 동시에 규덕과의 관계로 임신 중인 사월이 자결하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공연은 이 마지막 장면의 연출에 각별히 공을 들이는데, 달리 말하면 원작에서 이탈하거나 원작을 토대로 새로 보태진 공연요소들은 이 장면에서의 효과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작중인물 전부가 이 장면에서 총집결한다. 과부들과 토벌대 말고도 빨치산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작에서는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토막(土幕)들이 네모난 통 모양으로 둥글게 이어진 추상적인 형태로 변형되었다. 대신 무대의 전반적인 사실성은 수백그루 이상의 실제 대나무로 형상화된 숲의 풍경이 보완해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토막' 위의 다리 비슷한 공간에 등장하는 이들은 토벌대뿐만이 아니다. 원작에서는 언급되는 데서 그치는 토끼바위에서 학살된 이들과 그들의 사체를 파먹고 있던 까마귀떼도 그곳에 자리한다. 이전 장면에서도 원혼들은 떼로 그곳에 서서 자신들과 대화할 수 있는, 점례의 어린 시누이 귀덕에게 뜻밖에도 추위와 배고픔 같은 인간적인 고통을 호소하곤 했다. 까마귀떼는 일종의 코러스로서 기능하는데, 그들은 등장할 때마다 (정확한 가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남자들이 일으킨 불이 여자들의 마음에도 번져 물고 뜯고 한다'는 내용의 노래를 변주해서 부른다.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가장 표현주의적으로 처리되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애초에 이 공연을 통틀어 여러모로 가장 재미난 그들의 노래는 그런 연극적인 강조에 힘입어 더욱더 전쟁에 대한 작품 전체의 태도를 대변하는 듯하다.

생생한 스펙터클, 그리고 반전의 메시지

그렇게 이 모든 현실적·비현실적 인물들이 집결한 산불 장면은 사실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생생하게 구현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거대한 무대 뒷벽이 붉은 불길로 일렁이고 진짜 대나무가 가득한 무대로부터 대나무가 불에 타서 쪼개지는 소리가 퍼져나갈 때, 전쟁의 참화(慘火)에 대한 이 재현은 감각적 현실로 육박해온다. 연극사는 이런 '실제에의 열정'을 주로 교조적인 자연주의 혹은 과시적인 그랜드-오페라와 연관 지으며 폄하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너무나 적실한 예술적 자원이 되기도 하며, 이 '산불' 공연의 경우도 그렇게 볼 여지가 크다.

'산불'을 해오름극장의 개축 전 마지막 공연작으로 선정하는 단계에서 제작진이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얼마나 염두에 두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한동안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올 만큼 고조되어갔던 전쟁 발발의 위기 속에서 이 공연에 담긴 반전 메시지는 통렬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 땅에서의 전쟁은 '비극 제곱'이라는 말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다. 당연히 모든 전쟁은 비극이지만, 아직 해원을 이루지 못한 '인간적인' 원혼들이 머물 만큼 과거의 비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이 땅에서 전쟁은 더군다나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국립극장의 물리적 환경과 재정적·인적 자원이 없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스펙터클이 이 공연에서는 이렇게 훌륭하게 활용되었고, 너무나 당연한 주문이겠지만 국립극장은 이런 자기 몫을 찾는 노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적 면모가 엿보이다

이 공연의 드라마적인 차원, 특히 이미 상당히 노골적인 원작에 비해서도 성적인 모티프와 남녀의 대립구도가 강조된 각색의 기조 및 그와 연동된 창극적인 연기 스타일의 효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논평하고자 한다. 사실 이 공연에서 주요 여성인물의 형상화는 전체적인 주제와 묘하게 엇갈리는 측면이 있다. 앞서 언급한 까마귀떼의 주제가는 전쟁을 주도하는 가해자 남성 대 수동적인 피해자 여성이라는 통념적인 대립구도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 노래는 남성의 불(전쟁-폭력)을 여성의 불(원초적 애욕)에 대응시킨다. 젊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한 집단 장면에서 전쟁이 야기하는 결핍을 무엇보다도 성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성적인 욕망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언사가 전쟁 전의 가부장제 질서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곧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기까지 한다. 함께 규덕을 공유하고도 사월과는 달리 그 일탈적인 관계를 규덕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헌신으로 믿고 싶어하는 점례지만, 그녀는 사실 사월이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순간 바로 그 관계를 용인했다. 그렇다면 전쟁 상황은 여성들에게 자유의 공간을 열어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확실히 이런 인상은 창극적인 연기 스타일에 의해 강화된다. 예컨대 점례의 시어머니 양씨와 사월의 어머니 최씨는 원작에서는 서로 사사건건 맞부딪치는 사이고 전쟁이 야기하는 극한의 궁핍을 환기시키는 인물들이지만, 갈등 장면에서조차 고조된 감정이 노래로 표현되고 주변 여성인물들의 양식화된 동작과 배치가 보태질 때 여성인물들 전체가 하나의 통합적인 집단으로 화한다. 물론 결국은 여성의 몸 자체가 네메시스(임신)가 되어 결말의 비극으로 치닫는 플롯을 작동시키지만, 그 전까지 이 고립된 여성공동체는 상당히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원작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는, 상당히 혼란스럽지만 분명 페미니즘적인 지향을 보이는 이런 극적 요소들에 대한 이 공연의 처리 방식은 좀더 본격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일 것이다.

* 이 글은 창비 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