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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세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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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는 날씨가 변하면 살 곳을 옮기지만, 세입자는 전월세가 변하면 집을 옮긴다. 2년마다 오르는 방세에 이삿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니 이들을 난민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1937만가구 중 835만가구가 전월세 생활자다. 소름 끼치는 것은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계약기간도 2년이라는 점이다. 직장을 고려해 집을 잡더라도 2년이 지나면 집에서 쫓겨나 직장과 멀어지거나, 회사에서 쫓겨나 사는 곳과 관계없이 직장을 구해야 한다. 두 경우 모두 출근시간이 길어진다. 영세 자영업자들도 갑작스러운 임대료 인상에 가게에서 쫓겨나 집과 일터가 멀어진다. 그래서 전월세 난민은 생존을 위한 긴 여행, 출근길 지옥열차의 승객을 의미한다.

재밌는 것은 이 지옥열차를 타기 위해서 역세권의 비싼 방세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물론 몇 번 출구를 이용하는가에 따라 처지가 달라진다. 저렴한 집을 찾아 산에 올랐던 사람들은 마을버스가 정차하는 출구를 통해 도시와 연결된다. 도시의 경계를 벗어난 사람들은 서로가 내쉬는 한숨을 주고받으며 장시간 동안 짐짝처럼 옮겨진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자가용을 사야 하는데, 차량 유지비와 집값, 출근지옥과 교통체증 사이에서 복잡한 계산을 한다. 긴 출퇴근시간은 전월세 난민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는 고통스러운 연장노동이다. 물론 각자 한 대의 차를 소유하고 있는 부자들이야 아비규환의 역세권을 떠나 공기 좋고 조용한 곳에서 안전한 정착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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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층은 월세 난민이다. 2017년 주 40시간 일하는 최저임금 노동자의 월급은 157만원. 월세 40만원짜리 고시원에 산다면, 자기 소득의 4분의 1을 방세로 낸다. 한 달에 한 주는 집주인을 위해 출근하는 셈이다. 월세 난민의 꿈은 전세다. 서울 시내에 전세 6천만원짜리 큰 원룸에 살기 위해선 매달 50만원씩 10년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은행의 전세 자금 대출이 있다. 절망적인 것은 소득이 높을수록 대출액이 높고, 소득이 낮을수록 대출액이 낮다는 금융의 법칙이다.

자신의 노동과 은행에 이자를 주고 모은 전세금은 역설적이게도 집값을 올리는 원료로 사용된다. 집주인은 세입자가 낸 전세금으로 세입자가 들어갈 바로 그 집을 사거나, 집값이 뛸 거라 기대되는 다른 집을 살 수 있다. 2년 뒤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버리거나 다른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올려 받으면 앉은자리에서 수천만원을 번다. 그래서 전세 난민의 꿈은 은행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것이다. 집값만 오르면, 김생민처럼 아껴서는 결코 모을 수 없는 목돈을 한 번에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등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투기 열풍은 인간의 탐욕이 아니라 정직하게 일해서 버는 소득으로는 미래가 없는 현재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이다.

누군가는 눈높이를 낮춰 옥탑에 오르거나 지하방으로 내려가라 한다. 그런데 정작 낮춰야 할 것은 건물주의 엄청난 이익이 아닐까? 정부는 최근 전월세 난민을 구제한다며 각종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전월세 난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을 건물주에게 지대로 바치는 21세기판 지주 소작 시스템이다. 다수가 땀 흘려 얻은 소득으로 지주의 부를 쌓는 사회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토지 소유에 대한 과감한 과세와 이를 통한 토지 국유화가 필요한 이유다.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면 유토피아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